가난한 자들은 왜 민족주의자가 되었나
허지웅의 극장뎐 /
진보적이고 상식적인 말을 할 줄 아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특히 근사하고 빼어난 자들은 대개 풍족한 환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았다. 그들이 때로 광증을 운운하며 지적하는 불특정 다수 인민은 대부분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거나 내 가족 건사하는 데 영혼마저 염가로 팔아치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저 근사하고 빼어난 중산층 진보두뇌의 논리는 정작 그것이 깨우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잘 가닿지 않는다. 그런 식의 자극을 평소 즐기고 좋아하는, 그러나 삶 자체를 걸고 선택을 강요받을 필요가 없는 다른 중산층들에게 자기만족적으로 소비될 뿐이다.
이성에 반하는 광증을 다루는 영화의 태도가 그래서 새삼 중요하다. 알 만한 사람들끼리 보고 좋아할 자위용 영화를 만들 것인가, 그 안에서 다뤄지는 풍경 안에 실제 발 붙여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 줌의 환기라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영화를 만들 것인가부터 확실히 결정해야 한다. <디스 이즈 잉글랜드>는 후자에 해당되는 영화다. 영화는 1980년대 초반 대처리즘으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 서민 경제를 압살하고 있던 현장으로 관객을 인도한다.
<디스 이즈 잉글랜드>가 다루는 건 한 가난한 소년의 이야기다. 소년은 얼마 전 전쟁에 참전했던 아버지를 잃었다. 소속감이 절실했던 소년은 운 좋게 친구들을 사귀고 스킨헤드가 된다. 그러다 우익 민족주의에 경도된, 또다른 스킨헤드를 만난다. 영화는 이 급진적인 민족주의자들을 쉽게 괴물로 단정짓지 않는다. 대신, 덜 가지고 덜 배운 자들이 극우 민족주의자가 되는 맥락 혹은 필연성에 대해 사려 깊게 조명하고 나선다.
그것은 흡사 종교와 같다. 당신이 특별한 사람이라 이야기한다. 당신을 위한 거대한 계획이 있고, 당신은 그 안에서 큰 몫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 강조한다. 종교에 합리를 요구하는 게 무의미한 것처럼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괴물을 운운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거기 괴물은 없다. 사회가 보장해주지 못한 행복을 민족성에서 찾으려 했던 개인들의 방황이 있을 뿐이다.
물론 방관은 아니다. 소년은 결국 선택을 한다. 그러나 이 선택은 구호에 의한 것이 아니다. 상대를 바보 취급하거나 괴물로 만드는 구호보다, 그들이 선택한 삶의 방식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깊고 어려운 이야기를, <디스 이즈 잉글랜드>는 성장영화라는 장르적 틀을 빌려 쉽고 경쾌하게 그려내고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서 최소한의 인간성을 건사해내기 위해 가능한 전략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다.
허지웅 영화칼럼니스트
허지웅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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