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없는 산’과 어린 배우
김혜리의 카페 뤼미에르 / “동생을 잘 돌보라고 했잖니!” 엄마도 고모도 진이(김희연)에게 다그친다. 아직 돌봄을 받아야 할 여섯살 진이에겐 무리한 요구다. 어른들이 특별히 냉혹해서는 아니다. 생활고에 내몰린 엄마는 행적을 감춘 아빠를 찾으러 가야만 하고, 자매를 떠맡은 고모에게도 잔정을 베풀 여유는 없다. 동전으로 돼지 저금통을 가득 채우면 돌아오마고 약속한 엄마를 믿고 기다리지만 진이와 동생 빈이(김성희)는 버스정류장에서 먼지바람만 뒤집어쓴다. <나무 없는 산>의 김소영 감독은 이 영화를 위해 연기 경력이 없는 어린이들을 캐스팅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무도 모른다>, 자크 두아용의 <포네트>, 자파르 파나히의 <빨간 풍선> 등 어린이를 주체로 세운 많은 영화들이 비슷한 선택으로 성공했다. 유년은 훼손되지 않은 감수성의 마법이 조련된 재능을 압도하는 시기인 것이다. 어린이에 관한 영화는 다큐멘터리적 요소를 내포하는 한편 신파로 흐를 위험을 안고 있다. <나무 없는 산>은 그 두 골짜기를 피해 극영화를 만든 좋은 사례다. 우선 김소영 감독은 어린이를 카메라 앞에 세우면 영화가 감상(感傷)으로 흐르기 쉽다는 명제의 역을 보여준다. 아이들은 주어진 상황과 요구에 즉각 반응한다. 해석은 연후에 한다. 어른처럼 자신의 처지를 드라마로 만들지 않는다. 따라서 감정의 폭발은 오히려 지연된다. <나무 없는 산>에서 밥숟갈을 들지 않는 진이에게 고모가 “먹지 말고 네 방으로 가라!”고 일갈하자, 진이는 순순히 자리를 뜬다. 즉석에서 진이가 터뜨리지 않은 설움은 관객의 마음에 괸다. 정작 엄마가 떠나는 날 울지 않았던 진이는 동생의 딱지를 빼앗았다고 야단맞자 몹시도 서럽게 흐느낀다. 우리는 그 눈물에 엄마를 향한 참았던 야속함이 고스란히 들어 있음을 느낀다. 어린 배우의 위력은 연기보다 행동과 존재 자체에서 나온다. <나무 없는 산>의 원초적 슬픔은, 진이와 빈이가 세상에 비해 너무 작다는 단순한 시각적 대비에서 나온다. 버스의 문턱이 그들에게 너무 높아서, 아궁이에서 불을 쬐는 네 개의 손바닥이 너무 조그마해서 우리는 울컥한다. 어린이 영화에서 효과적 표현의 도구는 대사가 아니라 환경과 사건에 대응하는 배우의 리액션이다. <나무 없는 산>에서도 핵심적인 사건은 모두 아이들의 얼굴 위에서 일어난다. 김소영 감독의 카메라는 첫 장면부터 줄곧 진이와 빈이의 얼굴을 따라붙는다. 아이들 얼굴에 번지는 감정을 훼방 놓지 않기 위해 때로는 옆자리에서 등 뒤에서 포복하고 숨을 죽인다. 날짜의 경과를 명시하지 않는 <나무 없는 산>의 시간감각은 모호하다. 대신 학교도 가지 못하는 진이가 숱한 날을 혼자 올려다보았을 하늘의 이미지가 곳곳에 들어가 있다. 진이에게 시간이란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빛이었을 것이다. 긴 호흡의 연기가 불가능한 반면 찰나의 진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배우들에 맞춰 <나무 없는 산>은 짧은 숏을 종합해 영화를 꼼꼼히 축조했다. 다행이다. 진이와 빈이는 적어도 영화 안에서만큼은 감독의 세심하고 미더운 보살핌을 받았다. 김혜리 <씨네21>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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