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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죽은 이는 있는데 죽인 이는 없다

등록 2009-09-06 20:00

장근석·정진영 주연 ‘이태원 살인사건’
장근석·정진영 주연 ‘이태원 살인사건’
장근석·정진영 주연 ‘이태원 살인사건’




누군가의 흔들리는 발걸음. 그를 뒤따르는 또다른 누군가의 발걸음. 카메라가 둘을 쫓아 당도한 곳은 비좁은 화장실. 소변을 보는 한 남자의 뒷모습이 들어온다. 누군가가 칼을 번쩍 치켜들더니 남자를 마구잡이로 쑤신다. 고꾸라진 남자로부터 터져나온 피는 줄기를 이뤄 수챗구멍 너머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1997년 4월8일 서울 이태원의 한 햄버거 가게 화장실에서 벌어진 일이다. 희생자의 이름은 조중필. 여자친구와 햄버거 가게에 온 23살 대학생이었다.

97년 실제 사건 4년간 준비
수사·재판 과정 재현 집중
“용의자들 지금 뭘하고 있을까…”

실제 사건을 소재로 삼은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의 결말을 관객들은 이미 알고 있다. 한국계 미국인 피어슨(장근석)과 재미동포 알렉스(신승환), 둘 중 하나가 죽인 건 분명하지만, 끝내 둘 다 풀려나고 만다는 사실을. 상업영화로선 치명적인 결점을 안고 출발하는 셈인데, 홍기선 감독은 왜 이를 감수하면서까지 영화화를 결심한 걸까?

“막연히 한-미 관계에 관한 영화 소재를 찾던 중 이 사건에 대한 홈페이지를 발견했어요. 사실 저는 내용을 잘 몰랐거든요. 들여다보니 윤금이 살해사건이나 효순이·미선이 사건처럼 정치적으로 명확한 경우는 아니었어요. 미국은 전례 없이 수사에 철저하게 협조했으니까요. 대신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닌 용의자들의 이중적 정체성, 이태원이라는 다국적 공간, 문화적 정체성의 혼란 같은 미묘함에 오히려 확 끌리더라고요.”

홍 감독은 영화화를 결정하고 부인 이맹유 작가와 함께 사건 취재를 시작했다. 고인의 유가족은 물론 담당 검사, 용의자 변호인, 부검의 등 관련자 40여명을 만나고 관련 자료를 모았다. 두 용의자를 직접 만날 수는 없었지만, 사건의 얼개가 차곡차곡 맞춰졌다. 완성까지 그렇게 4년이 흘렀다.

영화에서 박대식 검사를 연기한 정진영은 언론 시사회에서 “이 영화는 할리우드 스타일의 스릴러가 아니라 감독님 스타일의 막걸리 스릴러”라고 말했다. 범인이 누구인지를 놓고 시종일관 팽팽하게 조이는 스릴러가 아니니 어긋난 기대는 하지 말아 달라는 뜻일 터. 실제로 영화는 스릴러와는 거리가 있다. 사건과 재판 과정을 충실하게 재현한 법정드라마에 더 가깝다. “스릴러 같은 장르영화는 절대 아니에요. 그런 오락영화를 만드는 재주도 없고요. 그저 사건을 순수하게 보여주자는 거였죠. 사건을 접하고 내가 느낀 것을 그대로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었거든요. 개인적으로 참 무섭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도통 알 수 없는 두 용의자의 속내도 무섭고, 끝내 사건이 미제로 끝난 것도 무섭고. 영화보다 더 미스터리한 현실인 셈이죠.”

이렇듯 스릴러가 아님에도 영화는 나름 긴장감을 자아낸다. 이미 결말을 알고 있음에도 대체 어떤 과정을 거쳤기에 그런 결론에 이른 건지, 실제 범인은 누구였던 건지에 대한 궁금증이 영화에 끝까지 몰입하게 만든다. 다만 감독이 의도한 대로 용의자들의 혼란스러운 정체성이나 이태원이라는 공간의 상징성이 충분히 표현됐는지는 의문이다.

“피어슨과 알렉스 두 캐릭터를 많이 파고들지 못한 게 사실이에요. 아쉽죠. 저도 둘의 속내를 끝내 알지 못했으니까요. 개인적으로 심증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어느 한쪽을 범인으로 몰아가며 그 심리를 표현하는 건 좀 아니라고 봤어요. 어쩔 수 없는 한계였죠.”

당연하게도 영화는 누가 범인인지 끝내 밝히지 못하고 끝난다. 둘 중 하나임은 확실하지만 그게 누군지를 확증하지 못해 둘 다 풀려난 용의자들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잘 살아가고 있을 터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다시금 화장실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진 남자에게 향한다.

“그 누구도 처벌하지 못한 건 수사 당국이나 재판부만의 책임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인 거죠. 안타깝고 슬프지만 그게 현실이었어요. 다시는 반복돼선 안 될 일이죠. 사실 스릴러 느낌의 엔딩을 찍어뒀어요. 얼굴을 알 수 없는 진짜 범인이 미국의 어느 카페에서 씩 웃는 그런 장면 말이에요. 하지만 버렸어요. 왠지 여기서는 중필이의 진혼곡으로 끝내는 게 옳을 것 같았거든요.”

홍 감독은 끝까지 정공법을 택했다. 10일 개봉.

글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영화사 도로시 제공

■ 홍기선 감독은 누구

한국 사회 부조리에 카메라를 들이대다


홍기선 감독
홍기선 감독
서울대 영화 동아리 ‘얄라셩’ 활동으로 영화와 첫 인연을 맺었다. 졸업 뒤 영화제작집단 ‘장산곶매’를 설립하고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룬 <오! 꿈의 나라>(1989)를 제작했다. 상업영화 데뷔작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1992)에서 현대판 노예선인 새우잡이 배 선원들의 삶을 통해 한국 사회의 부조리한 시스템을 고발했다. 이후 <선택>(2003)에서 세계 최장기 비전향 양심수 김선명씨의 삶을 다뤘다. <이태원 살인사건>은 그의 세번째 장편 연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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