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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입맛 떨어진 사랑…담백해서 깊은 맛

등록 2009-09-20 17:58수정 2009-09-20 21:21

안슬기 감독 <지구에서 사는 법>
안슬기 감독 <지구에서 사는 법>




허지웅의 극장뎐 /

여기 부부가 있다. 부부에게는 대화가 사라진 지 오래다. 시를 쓰는 남편은 외계인이다. 어디에서 어떻게 왔는지는 알 수 없다. 아내와의 시작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과거의 모든 풍경이 흐릿할 뿐이다. 그는 사람들과의 소통에서 심각한 단절감을 느낀다. 마지못해 찾아간 술자리에서도 역시 같은 좌절을 느낀 남자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정류장에 선다. 그때 같은 술자리에 있었던 세아라는 이름의 여자와 마주친다. 세아와 대화를 시작한 남자는 그들이 같은 별로부터 온 외계인이라 굳게 믿게 된다.

한편 평범한 공무원이라고 생각했던 아내는, 사실 비밀 정부 요원이다. 국내 거주하는 외계인들을 비밀리에 관리하는, 이를테면 ‘맨 인 블랙’ 같은 업무를 맡고 있다. 역시 남편과 대화하는 방법을 잊어버려 답답한 그는, 상관이자 동료인 요원과 무미건조한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중이다. 어느날 동료가 그에게 중요한 임무를 전달한다. 암살 지령이다. 목표는 남편과 만나고 있는 세아다. 임무를 수행하던 중 남편과 세아의 관계를 알아챈 아내는 분노에 휩싸인다.

안슬기 감독의 <지구에서 사는 법>은 에스에프(SF)적인 소재들을 끌고 들어오지만 그 속내는 확연한 불륜 드라마다. 독특한 외연에 끌려 재기발랄하고 흥미진진한 코미디를 예상했다면 실망할 것이다. 영화는 후반부를 제외하면 시종일관 차분하고 조용하며 그저 인물들의 감정선을 담아내는 데 충실하다. 외계인들이 그 정체를 공공연히 알 수 있을 만큼 남다른 외모나 특징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종류의 특수효과나 시지(CG:컴퓨터 그래픽)도 기대해선 안 된다. 전반의 톤과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감안하면 <디스트릭트 9>보다 <이터널 선샤인>에 가까운 영화다.

기억이 사라진 외계인과 그를 이용해 지구를 떠나고 싶어 하는 또다른 외계인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정부 요원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이 영화는, 사실 사랑의 정체에 관해 발언하고 있다. 한때 다른 별에서 온 것 같았던 한 쌍의 남녀가, 서로의 차이를 깊이 이해하고 바로 그런 점을 사랑했던 그들이 이제 와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것처럼 상대의 다른 점을 지겨워하고 끔찍해한다.

영화는 그렇게 반복되는 세상 위의 관성을 에스에프 소재로 감싸안아 우리들의 표정을 돌아보게 만든다. 그리고 그 오래된 기억들을 되살리고 끝내 관계를 회복하기까지 과정을 조명함으로써, 모두가 살아오면서 한 번 정도 입에 담아보았을, “다시 시작하자”라는 당신의 절규가 희망했던 바로 그 가능성을 제시하고 나선다. 장르가 주는 혜택을 이토록 잘 이해하고 쓸데없는 기름기를 빼 탁월하게 운용해낸 영화를 보는 일이, 근래 들어 특히 드물고 어렵다. 많은 사람들에게 가 닿을 수 있길 바란다.

허지웅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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