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팔아먹는 장삿속을 넘어
허지웅의 극장뎐 / 얼마 전의 일이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될 한국 영화 가운데 박철웅 감독의 <특별시 사람들>을 추천할 기회가 있었다. 만들어진 지 2년이 되도록 몇 가지 이유로 개봉되지 못했던 이 영화는 서울 강남구 개포동의 구룡마을을 배경으로 어느 가족의 여름 한 철을 다루고 있다. 그러자 추천사와 그에 포함된 사진을 본 누군가가 불편하다며 지적해왔다. 사진 속 주인공들이 가난한 사람들답지 않게 너무 멀끔하다는 이유였다. 사실 멀끔하다는 수사가 어울리는 사진이 아니었으나, 그는 서울역 노숙자의 외모를 언급하며 진짜 가난에 대해 설명하려 했다. 처음에는 가난의 충격적인 이미지를 강요하는 폭력으로 여겨져 불쾌했다. 그 자체가 이미 타자화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머릿속으로만 사고하는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행복해 보이는 약자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사실 이미지 컷 하나만으로 특정 영화의 태도를 가늠하려는 시도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런 식의 오해가 최근 수년 동안 충무로 영화가 소재주의의 일환으로 가난을 다뤄온 결과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1번가의 기적>을 들 수 있다. 이 같은 영화들은 못사는 아이가 잘사는 아이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는 식의 설정에 유난스레 집착한다. 가난을 연민과 슬픔 혹은 공포로 소비하는 데 익숙해져 있는 중산층 관객들의 의식을 공략하는 것이다. 이때 감독의 카메라는 관객의 알량한 눈물 한 방울을 위해 ‘가난은 정치적으로 옳은 것’이라는 환상과 강박을 만들어낸다. 그래 놓고 정작 끝에 가선 흡사 쓰나미 이후의 <해운대>처럼 모든 인물들의 갈등을 어떤 대책도 합리도 없이 (해소가 아니라) 증발시킨다. 그렇게 행복한 결말. 현실의 가난을 착취하는 영화란 바로 그런 것이다. 절대빈곤이라는 것이 인구의 과반수에 해당되는 문제가 아닌 상황에서 가난을 다루는 영화의 태도란 세심하되 분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태도는 가난의 재현 강도 따위로 확인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서사상의 전략적 추임새로 가난이 소비되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특별시 사람들>에는 그들이 가난해서 불쌍하다는 이야기 대신, 회복 불가능으로 방치됐던 한 가족이 지독한 가난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좀 더 깊은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더불어 그들 사이의 신뢰를 회복하고 복원하는 풍경이 있다. 가족을 바라보는 시각이 보수적이고, 특히나 여성 캐릭터가 영화에 밀착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음에도, 이 영화는 최소한 가난을 다루는 시각에서 방관이나 장삿속이 아닌 책임감 있는 연대의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를 추천했다. 여러분에게도 그러고 싶다. 허지웅 영화 칼럼니스트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