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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블로그] 누가 <서편제>를 잘 만든 영화라 하는가 / 마광수

등록 2009-10-08 17:07

이청준의 원작 소설을 김명곤이 각색하고 임권택이 연출한 영화 <서편제>를 보았다. 1백만 가까운 관객 동원에 성공하여 한국 영화사상 최고의 흥행 실적을 올리고 있는 영화라는 점에서, 그리고 이 영화에 대한 내 주변 사람들의 평가가 칭찬과 폄하의 양극을 달리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한결 신경을 곤두세우고 화면을 주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서편제>의 줄거리는 이렇다.

서울에서 어느 판소리 대가의 문하생으로 있던 우봉(김명곤)은 스승의 애첩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 바람에 스승에게서 쫓겨나 시골을 떠돌아다니며 날품팔이 소리꾼으로 살아간다. 그러다가 조실 부모하여 오갈데 없는 고아가 된 송화(오정혜)를 얻어 양녀로 삼고, 다시 어느 시골 과부와 눈이 맞아 살림을 차린다.

그러던 중 여인이 산고 때문에 어린 핏덩이와 함께 죽자, 여인이 데리고 들어온 자식인 동호(김규철)까지 양아들로 삼아 기르게 된다. 송화는 비록 피가 섞이지 않은 의붓동생이긴 하지만 남동생을 끔찍이 사랑하여 누이로서의 정을 쏟는다.

유봉은 딸에게는 소리를 가르치고 아들은 고수로 키워 자신의 뒤를 잇게 하려고 애쓰는데, 딸은 소리에 매력을 느껴 진전이 빠르지만 아들은 그렇지가 않다. 더구나 해방 후 물밀 듯이 들어온 양악으로 인해 판소리의 인기가 시들자 생활고까지 겹쳐, 결국 동호는 누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의붓아버지 곁을 떠나고 만다.

동생을 잃은 슬픔 때문에 송화가 소리를 하지 않게 되자 유봉은 초조해진 나머지 딸에게 주는 한약에 부자(附子)를 섞어 딸의 눈을 멀게 하는데 (여기서부터가 껄끄럽다), 딸은 그 사실을 알고도 체념해 버린다. 눈먼 장님이 된 송화는 유봉이 예상했던 대로 한에 사무쳐 다시 소리를 하게 되고, 아비를 전혀 원망하지 않고 극진한 효성을 보인다.

유봉은 결국 두메산골 폐가에서 쓸쓸히 죽어 가고, 혼자 남은 송화는 비렁뱅이 소리꾼으로 전락하여 각지를 전전한다. 한약방의 조수로 정착한 동호는 그 뒤 누이를 못 잊어 삼지사방을 찾아 헤매다니다가, 결국 한촌 객주집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는 누이를 만난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숨긴채 그녀에게 소리를 청하여, 자신의 북장단에 맞춰 신명나게 불러젖히는 누이의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나서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와 작별하고 서울로 올라가는데, 자신과 누이의 상봉이 행여 누이의 한(恨)을 약화시켜 소리에 지장을 줄까 봐서다 (이 대목도 좀 어색하다). 송화는 남동생이 떠나간 뒤 (그녀는 북장단 소리를 듣고 자기를 찾아온 손님이 동생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3년 동안 얹혀 살아왔던 객주집 주인 홀아비와 작별하고 다시금 정처없는 나그네 길을 떠난다.

얼핏 보면 꽤 복잡해 보이는 스토리 같지만 영화에서는 스토리적 요소들이 대부분 대사 몇마디로 간단히 처리되어 있어, 영화를 끝까지 다 보고 난 뒤의 생각은 참한 음악 영화 한편을 보았다는 느낌이었다. 여러 곡의 판소리가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판소리가 주는 음악적 효과, 특히 한국인 특유의 감정인 감상적(感傷的) 정한(情恨)에 호소하는 프리미엄을 빼고 나서 이 영화를 생각해 보면 여러 가지 문제점을 지니고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이 영화가 '국제적 보편성'을 결(缺)하고 있으며 지나치게 과거지향적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문제점들이 최근들어 다시 극성을 부리고 있는 국수주의적 세계관에 바탕한 문화적 쇄국주의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착잡한 심정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서편제> 후반부에는 판소리 <심청가>의 여러 대목이 나온다. 송화가 아버지 때문에 눈이 멀게 된 것과 심청이가 부친을 위하여 물에 빠져 죽게 된 것이 서로 비슷한 상황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삽입된 것일 것이다. 플롯으로서의 개연성에 비춰보면 유봉이 단지 딸이 소리를 다시 하게끔 유도하는 목적으로 그녀에게 극약을 먹여 눈을 멀게 한다는 설정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송화가 장님이 되면 다시 소리를 하게 된다는 확실한 보장도 없는 상황에서, 유봉은 눈곱만치의 고뇌도 보이지 않고 태연히 약을 먹인다.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는데, 내용의 끔찍함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유봉역을 맡은 배우가 너무나도 무표정한 얼굴과 범상한 억양으로 그 장면을 처리해 내도록 시킨 연출자의 무신경이 안쓰럽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더욱 이상했던 것은, 송화가 눈이 멀게 된 뒤에도 전혀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네가 장님이 돼야만 한(恨)이 생겨 소리를 다시 하게 될 것 같아서 부자가 든 약을 먹였다. 이해해라"라고 뻔뻔스런 어조로 아버지가 한 마디 하자 송화는 묵묵부답, 눈물 한 방울 안 흘리고(체념하는 표정 같은 것도 없다) 모든 것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인다.

<심청전>의 심봉사를 능가하는 절대 부권적 권위주의의 행사인데, 연출자가 이 장면을 심드렁하게 처리한 것은 아마도 유봉이 심봉사에 비해 한결 비이기적인 부권을 행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즉 심봉사는 자기가 눈을 뜨기 위해 딸을 팔아먹었지만, 유봉은 판소리의 맥을 잇기 위해서 '할 수 없이' 딸을 장님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는 설정이, 관객들에게 그럴 듯하게 먹혀들어 가리라고 예상했을 것 같다는 말이다.

마지막 대목에서 동호가 헤매고 헤매던 끝에 누이를 찾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돌아서 버리고 만다는 설정 역시 지극히 부자연스러웠다. 동호는 원래 판소리에 대해 이해와 사랑이 부족한 인물이었다. 돈벌이도 되지 않고 그렇다고 이렇다 할 보람도 느낄 수 없는 국악 공부에 염증을 느껴 아버지 곁을 떠났던 그가, 갑자기 한맺힌 창자(唱者)가 부르는 판소리의 예술적 가치를 확신하여 누이를 그냥 내버려두고 떠난다는 것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는 국악을 경멸했던 자신의 과거를 뉘우치고 새 사람이 된 셈인데, 판소리가 갖는 예술적 가치를 체득했다고 해서 불쌍한 누이까지 그냥 내버려 둘 필요가 있었을까? 내 생각대로라면 그는 눈먼 누이를 보자마자 얼싸안고 울며 아버지의 비정을 한껏 나무란 뒤, 누이를 서울로 데려가 용한 안과 의사한테라도 보였어야 했다.

도대체 가슴속에 맺힌 울화와 한이 있어야만 좋은 소리가 나온다는 생각 자체의 출처가 나로서는 의심스럽다. 정말로 그렇다면 <춘향가> 같은 데서 춘향과 이도령의 첫날밤 성희 장면 같은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속속들이 한맺힌 소리꾼이 어떻게 그런 대목을 노래부를 수 있단 말인가? 궁극적으로 모든 예술은 결국 기교에 의해 예술적 성패가 좌우되는 것이다. 실제로 한맺힌 인생 경험을 갖고 있는 배우라야만 비극적 연기를 훌륭하게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듯이, 판소리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서편제> 전편에 흐르는 예술 철학적 기조는 다분히 예술가 개인과 예술 작품의 내용을 동일시하고 있다. 부모님 상을 당하고 나서라도 희극 연기를 훌륭하게 소화해 낼 수 있는 배우라야만 진짜 배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렁뚱땅 간과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의 생각은 마치 문학 작품의 내용과 작가의 사생활을 동일시하는 경우와도 견주어질 수 있다. 작가의 체험이 문학 작품 속에 그대로 투영될 수밖에 없다는 식의 반영론적 사고는 작가의 상상력과 사회적 입지를 위축시켜 문학을 결국 이중적 위선으로 가득찬 도덕 교과서로 전락시킨다.

물론 우리나라 사람들이 갖고 있는 비극적 세계관이 판소리 예술에 있어 한의 중요성을 더욱 더 두드러지게 만들었다고 볼 수도 있다. 새가 지저귀는 것을 영어로는 'Birds sing'이라고 하지만 우리말로는 '새가 운다'고 표현한다. 그렇게 되면 결국 모든 노래는 다 '우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기 때문에 한의 미학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러한 한의 미학을 완성시키기 위해 일부러 장님까지 되어가며 자신을 자학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송화 자신이 스스로 장님되기를 원한 것은 아니지만, 이 영화는 그런 식의 자발적 희생을 은근히 부추기고 있다).

내 보기에 그것은 마치 서양 중세 암흑시대의 수도사들이 신앙심을 고양시키기 위해 자신의 성기를 거세하는 것과도 비슷한 행위로 여겨진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서편제>의 경우엔 가톨릭 신앙이 왜곡된 '효' 사상으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유봉이 딸에게 서슴없이 극약을 먹일 수 있었던 것은 '판소리의 계승'이라는 표면적인 이유보다 '내 딸이니 내 맘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더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개연성이 없기로는 라스트 신이 가장 심했다. 송화가 객주집 홀아비 곁을 떠나 다시금 정처없는 방랑길에 오르는 장면인데, 뜬금없이 웬 어린아이 하나가 등장하여 송화 손에 쥐어진 끈을 잡고 길잡이 역할을 한다. 그러자 조용하던 관객석 여기저기서 수런수런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내 옆좌석에 앉아서 영화를 감상하고 있던 어느 중년 여인의 입에서는 대뜸 "아니, 그새 어디서 딸을 낳았나?"라는 중얼거림이 새어나왔다. 나 역시 그만하면 잘 나가다 삼천포로 빠진 느낌이 들어 뒷맛이 개운치가 않았다. 아마 무슨 상징적 여운이나 메시지 같은 것을 염두에 두고 그런 장면을 고안해 냈나 본데, 너무 부자연스럽고 지나치게 작위적이었다.

난데없는 어린아이의 출연도 어색하려니와 정처없이 방랑길을 떠난다는 것 자체가 아주 촌스럽고 부자연스럽다. 아니 장님된 몸으로 어떻게 갈 곳도 정해 놓지 않고 무작정 깅을 떠날 수 있단 말인가? 영상미도 좋고 상징성도 중요하지만 모든 것은 역시 '그럴 듯함'의 범주 안에서 처리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단점에도 불구하고 {서편제}에 관객들이 몰린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최근 들어 다시 새롭게 고조되고 있는 '우리 것 되찾기' 운동과 무관하지 않다. 몇 년 전에 발간되어 초 베스트 셀러가 된 <소설 동의보감> 이후 <소설 토정비결>, <소설 목민심서> 등 수많은 유사 소설들이 발간되었는데 <서편제> 역시 그러한 복고적 민족주의의 바람을 타고 대중들에게 크게 어필하고 있는 듯하다. 수없이 쏟아져 나온 역사 인물 소설들이 작품의 완성도 면에 있어 대부분 형편없이 조악한데도 불구하고 독자를 끌어모은 것은, 주인공을 '자랑스런 한국인'으로 내세워 영웅화시켰기 때문이었다.

물론 영화 <서편제>는 어떤 인물을 영웅화시킨 것이 아니라 국악 '판소리'를 영웅화시켰다는 점이 다르다. 하지만 민족적 정체성과 우월감을 과장적으로 고양시켜 수용자들이 갖고 있는 배달민족으로 태여난 데 대한 무의식적 열등감을 누그러뜨려 주는 한편, 거기에 대한 일종의 무의식적 방어 메카니즘으로서의 국수주의적 민족주의 감정을 유발시킨다는 점에 있어서는 둘 다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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