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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가난에 부르튼 인생, 눈물마저 지쳤을까

등록 2009-11-22 18:58수정 2009-11-22 19:02

영화 ‘나는 행복합니다’
영화 ‘나는 행복합니다’
역설의 영화 ‘나는 행복합니다’
입술이 부르튼 남자가 입술이 부르튼 여자를 바라본다. 초점을 잃고 흔들리는 눈동자가 중심을 잃고 텅 빈 눈동자를 바라본다. 윤종찬 감독의 <나는 행복합니다>는 부르튼 입술을 가진 두 사람의 눈동자가 만나는 영화다. 지치고 남루한 둘은 동병상련을 직감한다.

현실 포기한 과대망상 남자
빚에 짓눌린 신용불량 여자…
‘정신줄 놓은 현실’ 꼬집어

■ 그 남자, 만수 하나뿐인 형은 오늘도 도박에 빠져 있다. 밑천이 떨어지면 집으로 쳐들어와 돈을 빼앗아 간다. 이제 마지막 남은 가게(카센터) 문서를 내놓으란다. 싫다고 하면 부수고 때린다. 엄마는 아예 정신줄을 놓아버렸다. 치매에 걸린 엄마는 집을 나갔고, 도박 빚에 몰린 형은 목숨을 버렸다. 아, 나도 엄마를 따라가고 싶다, 고 느끼는 순간 천국에 도착했다. 이곳에선 내가 억만장자다. 스위스 은행에 내 계좌가 있다. 하얀 종이에 내가 금액을 쓰고 사인만 하면 바로 현금처럼 쓸 수 있다. 이곳을 나가기 싫어졌다. 바라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여자도 생겼다. 정신병원 간호사다.

■ 그 여자, 수경 아빠가 아프다. 돌볼 사람은 나밖에 없다. 병원비 대느라 신용은 망가졌다. 월급 차압까지 들어왔다. 같이 일하는 의사는 나를 쫓아내고 싶어 안달이다. 사귀다 헤어진 내가 불편한 것이다. 이제 다른 간호사와 대놓고 사귄다. 병간호하랴 야근하랴 제정신이 아닌데, 이 남자까지 나를 괴롭힌다. 내가 근무하는 곳은 제정신 아닌 사람들이 치료를 받는 곳이다. 겉은 멀쩡해 보여도 저마다 한 군데씩 빈방을 갖고 있다. 위급해지면 그 방으로 숨는다. 새로 온 만수씨는 ‘백지 수표’라는 방을 갖고 있다. 어제는 그가 준 ‘백지 수표’로 피자를 시켜줬다. 자기만의 방에 숨은 그가 부럽고 안쓰럽다.

■ 절절한 ‘가난’ 이야기 이들은 다만 바라본다. 단 한번의 신체 접촉도 없는데도 진한 감정의 여운을 느끼게 하는 <8월의 크리스마스>의 역설이 이 영화에 있다.

이청준의 단편 소설 <조만득씨>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멜로를 하위 플롯으로 깔고 ‘가난’에 대해 말하는 영화다. 환자의 병원비와 간호를 온전히 가족이 떠맡아야 하는 무책임한 ‘독박’ 시스템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과장하지 않고 무덤덤하지만, 이토록 절실하게 가난을 말하는 영화가 지금까지 있었나 싶다. 상대적으로 무미건조한 원작이 감독과 배우들의 정신과 육체를 통과해 심금을 울리는 작품으로 다시 태어났다.

최악의 상황에 놓인 두 남녀의 눈빛 멜로. 먹먹한 슬픔에 가슴이 멍해진다. 26일 개봉.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사진 디씨지플러스 제공



배우 현빈
배우 현빈
‘정신병자’로 변신한 현빈

“매력적 시나리오…내가 먼저 덤볐다”

지금으로부터 1년여 전,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상영된 <나는 행복합니다>를 보고 올라온 한 영화감독이 이렇게 말했다. “현빈이 연기를 해요.” 현빈(27)에게 이 말을 전했더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그렇게 보실 수 있겠네요. 여태까지 했던 것 중에 가장 센 역이잖아요. 저는 지금까지 나름대로 ‘연기하고 있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안 좋은 얘기인 것도 같고, 조금씩 발전해가고 있다는 얘기로 받아들이면 좋은 것도 같고요.”

물론 이 말을 한 감독은 “영화가 좋다”며 칭찬으로 한 말이다. 현빈 말마따나 자신과 “어떤 접점도 없는 캐릭터”를 만난 현빈은 ‘백마 탄 왕자’의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벗어던졌다. 흔들리지 않는 자신감으로 흔들리는 눈빛을 연기했다. 그는 “계속 연습했더니 어느 순간 초점이 나가버리고, 멍한 표정이 나오기 시작했다”며 “그런데 촬영 끝나고 숙소로 들어갈 때는 머리가 깨지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만수’라는 배역은 현빈을 위해 쓰여진 캐릭터가 아니었다. 소속사 임원이 어디선가 가져온 시나리오를 받아든 그는 읽자마자 감독에게 연락해 출연하고 싶다고 말했다. 윤종찬 감독은 ‘백마 탄 왕자’가 왜 정신병자 역을 하겠다는 건지 미심쩍어했다고 한다.

“시나리오가 묘한 매력이 있었어요. 우울하고 답답한 얘긴데 제가 계속 웃으면서 읽고 있는 거예요. <나는 행복합니다>라는 제목처럼 반어적이잖아요. 잘할 거라는 생각은 안 했지만, 분명히 뭔가 얻을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예상대로 이 작품은 그에게 많은 걸 생각하게 했다. “나는 행복한가? 스스로 질문해봤죠. 행복한 놈이더라구요. 고등학교 때부터 좋아하던 연극 했고, 지금 사랑받고 있고. 불행한가? 불행한 놈이더라구요. 누가 불러줘야만 일할 수 있고, 거의 모든 걸 포기해야 하니까요. 아무튼 전보다 성숙된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아요.”

‘백마 탄 왕자’로서의 현빈은 상대 여배우들에게 가려져 있던 게 사실이다. 영화 <키다리 아저씨>가 그랬고,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이 그랬다. 영화 <나는 행복합니다>는 그에게 반환점 같은 작품이다.

인터뷰를 마친 현빈은 미국으로 떠났다. 아마도 지금쯤 <색, 계>의 여배우 탕웨이와 함께 <만추>의 리딩 연습에 한창일 것이다. 세심한 연출로 정평이 난 김태용 감독과 자칭 ‘완벽주의자’ 현빈이 만나 어떤 물건이 나올지 기대된다.

이재성 기자,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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