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집 잡기 힘든 ‘에반게리온’의 진보
허지웅의 극장뎐 / 얼마 전 애니메이션을 하는 친구를 만났다. 이 바닥에 누군들 안 그렇겠냐만 요즈음 형편이 편치 않다. 그가 차기작 구상을 설명하면서 유명세를 가져다주었던 십년 전 작품의 세 번째 시리즈 이야기를 늘어놓기에 ‘한국의 안노 히데아키’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작품이 사골도 아니고 몇 번을 우려먹느냐고. 스물여섯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1995년 원작 티브이 시리즈에 두 편의 97년도 극장판. 금세기 들어 야심차게 선보였던 티브이 시리즈의 리뉴얼판. 그리고 이제 와 새롭게 만들어진 두 편의 신극장판까지. 사실 안노 히데아키의 작가 정신을 가장한 상술은 <에반게리온>이 아니라 <사골게리온>이라는 악담을 들어도 억울할 게 없는 것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비(B)자 테이프를 돌려보며 뭔 말인지 알아먹을 수도 없는 일본말로 ‘소년이여 신화가 되어라’를 씨부렸던 90년대 키드에게 <에반게리온>은 그저 평범한 애니메이션일 수가 없다. 이건 성서다. 원작이 구약이라면 신극장판은 신약이다. 그것도 킹 제임스판이다. 에반게리온 근본주의자로서 아무래도 냉정해질 수 없는 것이다.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 파>(이하 <파>)는 여러모로 파격적이다. 적당히 변주되고 비틀어지는 것 따윈 없다. 이건 전혀 다른 그림이다. 원작은 고슴도치에 관한 이야기였다. 소년이 있다. 관계를 위한 너와 나 사이의 가장 좋은 거리를 찾아내는 게 너무 힘들다. 다가가면 괴롭고 멀어지면 외롭다. 그래서 어느 파괴적인 선택을 한다. 이럴 거면 더 이상 아무도 괴롭지 않도록 아예 하나가 되자는 거다. 그러나 곧 후회하고 그렇게 상처받고 아물기를 반복하더라도 나, 로서 존재하겠다는 결론에 이른다. 신극장판의 신지도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다만 그러한 결론에 좀 더 빨리 이르고, 원작과는 아주 다른 전개를 보여줄 기세다. <서>가 떡밥에 불과했다면 <파>는 완연한 서곡이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벌써)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재현이다. 단순한 공기의 문제가 아니라 완전히 똑같은 컷도 두세 개 발견된다. 특히 레이 자폭에 관련된 마지막 시퀀스는 복합적인 의미에서 압권이다. 액션 연출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더 이상 어디서도 제대로 된 거대로봇 애니메이션을 볼 수 없는 세상에, 이토록 화려한 합으로 꽉 짜인 로봇물을 그것도 극장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벅찰 따름이다. 나는 신극장판이 원작으로부터 유래한 같은 연속선상의 시간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있다. 원작의 마지막, 그 완벽한 종말과 새로운 탄생 이후에, 다시 재구성된 세계의 후일담 말이다. 모든 건 반복되면서 아주 조금씩 진보한다고 믿는다. 우리들도, 우리들의 불행한 소년도, 이제는 조금 더 행복해져야만 한다. 허지웅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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