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는 쌀도 아깝다?
허지웅의 극장뎐 / 제임스 캐머런은 자신과 새 영화에 쏟아질 그 모든 상찬을 이미 오래전부터 짐작하고 있었을까. 그럴 것 같아 왠지 괘씸하다. 신작 <아바타>는 야심으로 가득 차 있다는 수사가 더 이상 어울릴 수 없는 영화다. 스크린에 영사되는 그 모든 프레임 하나하나에 감독의 객기에 가까운 고집과 강박이 묻어난다. 허풍 같은 영화다. 압도적인 풍경이다. 줄거리를 늘어놓기에는 새삼 지면이 아깝다. 중요한 건 <아바타>의 이야기가 새로울 건 없되 몇 가지 지점에서 흥미롭다는 사실이다. 언뜻 보기에 ‘우주세기 포카혼타스’ 같은 <아바타>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다. 자연과 교감하며 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있는 집단이 다른 집단의 자연 파괴적인 군사행동에 맞서 싸운다. 무대를 지구에서 행성 판도라로 옮겼을 뿐이다. 나비족의 네이티리는 나우시카 공주에 직접 대입된다. 내러티브나 캐릭터뿐만 아니라 시각적인 부분에서도 노골적으로 닮아 있다. 그런데 <아바타>의 주인공은 네이티리(유사 나우시카)가 아니다. 나비족의 형상을 과학기술의 힘으로 취한 지구인 제이크다. 여기서 <아바타>의 또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그걸 <프랑켄슈타인> 혹은 쉽게 <디스트릭트 9>이라 생각해도 좋다. 새 몸뚱이를 얻은 제이크는 지구인의 관점에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무대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뒤바뀐 공간이다. 나비족이 정상이고 지구인은 비정상이다. 그런 맥락에서 주인공 제이크는 전복된 괴물이다. 이 괴물이 그의 창조주가 아닌 다른 괴물들을 위해 싸운다. 그로 인해 영화가 흥미로워진다. 애초 지구인들이 행성 판도라에 간 목적은 자원 채굴이다. 그러나 이 사실상의 정복사업은, 심각한 자원고갈 문제를 겪고 있는 지구의 사정이 전제되어 있기에 뉘앙스가 달라진다. 당장은 기업의 이익이지만 인류라는 종족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생존을 건 공익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전복된 괴물인 주인공이 인간이길 포기하고 편을 달리하는 대목은 사실 대단히 실질적이고 직접적인 도발이다. 인류라는 말조차 어색한 지구인 앞에 던져진 이 우주적인 마인드의 불경함이라니. 그렇다고 <아바타>가 이 더럽고 천박하며 탐욕스러운데다 잔인하기까지한 인간들아 너희들을 살려두기에는 쌀이 아까워, 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최소한 결과적으로는 아니다. 어찌됐든 관객이 자연스레 지지하게 되는 건 지구가 아닌 판도라의 공익이기 때문이다. 같은 종족의 공익이 파괴되는 걸 보면서 그것이 옳은 일이라 느낄 수 있는 건 인간밖에 없을 것 같다. 그 한 줌의, 최소한의 이성적이고 반성할 줄 아는 사고가 인간을 아직까지는 존중될 가치가 있는 종으로 만든다. 허지웅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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