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미 리 존스가 전한 ‘절망의 풍경’
김혜리의 카페 뤼미에르 /
한 배우가 서로 다른 영화를 가로질러 마치 동일인처럼 보이는 캐릭터를 연기할 때는 둘 중 하나다. 첫째는 그냥 지독하게 연기 폭이 좁은 경우. 둘째, 그 배우의 육체와 정신이 시대의 표정을 드러낼 때다. 토미 리 존스는 후자에 속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엘라의 계곡> <일렉트릭 미스트>에서 토미 리 존스는 거의 똑같은 캐릭터로 분했다. 그는 가부장의 책임감과 도덕적 우월감을 품고 (때로는 폭력도 마다하지 않고) 평생 육체로 세상과 부대껴 왔으나, 이해 불가능한 지경으로 망가져 버린 현대 세계의 질서 앞에 망연자실한 미국 남부의 늙은 사나이다. 존스의 옆자리에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그리고 <더 로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작가 코맥 매카시가 있다. (비유를 떠나 둘은 실제로도 존스의 친구다.) 먼 선배로는 존 웨인을 호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언급한 세 편에서 존스의 연기는 곧 영화의 주제다. 아니, 그가 연기하는 인물은 영화의 품을 넘어 범람한다. <엘라의 계곡>에서 존스는 이라크전에서 돌아온 후 기지에서 실종된 아들의 궤적을 쫓는 퇴역군인 행크 디어필드다. 추적의 끝에서 그는 평생을 수호해 온 국가와 조직이 괴물로 변한 광경을 본다. 이 영화는 리듬 자체가 존스의 호흡에 맞춰 조율됐다는 인상마저 준다. 디어필드는 대화할 때 상대방 질문의 중량을 달아보듯 잠깐 멈췄다가 대답한다. 군 기지 근처 모텔에 투숙한 그는 두려움과 비탄 와중에서도 구두를 말끔히 광내고 이부자리를 각세워 정리한다. 디어필드가 행동하는 보수적인 속도와 일 처리 방식은, <엘라의 계곡> 전체가 미스터리를 풀어가고 인물의 감정을 관리하는 방법을 지배한다.
잊기 힘든 두 장면이 있다. 아들의 주검 ‘일부’가 발견됐다는 통지를 품은 군인이 찾아오자, 디어필드는 잠깐 양해를 구하고 화장실로 들어가 그날 아침 면도를 하다 생긴 상처에 휴지를 떼어 붙인다. 마침내 비보가 상대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아버지는 사이도 두지 않고 “그럼 내 확인이 필요하겠군”이라고 대꾸한다. 그러나 순간 그의 목에 붙은 손톱만한 휴짓조각의 쿨럭임은 스크린 전체를 흔든다. 다른 장면에서 부검의는 불에 타고 짐승에게 먹힌 아들의 뼈에 남은 자상이 42군데라고 보고한다. 아버지는 잡아채듯 묻는다. “칼이 하나요? 여, 러, 개요?” 한 단어의 분절만으로 뼈가 깎이는 감각을 전하는 연기다. 디어필드는 아들이 괴물에게 삼켜졌다면 그 괴물을 사냥할 용의가 있는 아버지다. 그러나 연이어 드러난 진실은, 아들이 죽기 전 이미 괴물의 일부가 되었으며, 그 괴물은 남자 자신을 지탱해 온 가치까지 거꾸러뜨렸음을 가리킨다. 토미 리 존스의 깊게 골이 팬 얼굴이 멸망 이후의 풍경과 포개지는 순간은 그때다.
김혜리 <씨네 21>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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