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묵은 영화, 다시 무릎 친 이유
허지웅의 극장뎐 / 최근 2년간 글 안에서 <브이 포 벤데타>를 언급하는 경우가 부쩍 잦아졌다. <브이 포 벤데타>는 독재정권의 폭압에 맞서 싸우는 테러리스트의 이야기다. 최근의 우리 사회 풍경과 더불어 고심해볼 만한 요소가 많은 영화다. 영화가 개봉했던 2006년에 나는 영화 주간지에서 일하고 있었다. 정작 당시에는 이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모든 걸 지나치게 단순화시켜 낭만적으로 얼버무리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의 리뷰를 찾아보았다. “무거운 담론과는 상대적으로, 파쇼 정부를 묘사하는 방법론은 <스타쉽 트루퍼스>가 보여준 반어법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파쇼 정권을 겪어낸 우리 입장에서 볼 때 <브이 포 벤데타>가 보여주는 국가의 폭력이란 쉽게 동화되기 어려울 정도로 미온적이고 단순하다.” 그로부터 세상이 참 많이 달라졌다. 한 걸음이라도 나아갔다면 <브이 포 벤데타>에 대한 의견은 달라질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퇴행한 것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새삼 영화란 당대와 호흡하는 유기체와 같은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브이 포 벤데타>에 대한 나의 관점이 완벽히 바뀌었기 때문이다. 정치사회 환경의 공기가 변했다. 그 공기 안에서 2006년의 <브이 포 벤데타>와 2010년의 <브이 포 벤데타>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영화 속 광장으로 쏟아져 나오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며 우리의 촛불 광장을 떠올렸다. 영화 속 파쇼 정부가 미디어를 통제하고, 아니 굳이 통제가 미치지 않는 부분이라도 미디어가 자처해 나팔수 노릇을 하는 대목에서 우리의 언론 환경을 다시 한 번 환기했다. 영화 속 체계가 부실하고 단순했던 정치적 폭압의 풍경이, 우리의 지금 현재 삶 속에서는 단순하다기보다 실제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어제의 얇고 낭만적인 텍스트는 오늘의 단단하고 현실 반영적인 텍스트로 변모한다. <브이 포 벤데타>에서 티브이 전파를 통해 모습을 드러낸 브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책임은 물론 국가가 지고 있습니다. 반드시 그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할 작정입니다. 그러나 사태가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가장 큰 원인은, 거기 앉아 티브이를 보고 있는 여러분들이죠. 바로 여러분이 방임했기 때문입니다.” 영화 말미, 사람들은 저마다 브이의 가면을 얼굴에 뒤집어쓰고 약속된 날 약속된 광장으로 나선다. 자성을 동력으로 무기력을 깨고 행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광장에 나서 힘을 갖고 세상을 바꾸길 열망한 것이다. 우리는 어찌할 것인가. 새로운 한 해에 첫발을 내딛으며 희망 어린 포부를 논하기보다 나아질 게 없을 것이라 비관하며 근심하게 돼 아쉽고 슬프다. 그러나 경제 회생을 위해 범법자를 사면시키는 세상이다. 경제를 위해서라는 말의 프레임 안에서 나의 경제와 그들의 경제를, 나의 주머니와 그들의 주머니를 구분 짓지 못하는 이상 여기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다.
허지웅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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