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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뜨거운 사랑보다 기다리는 사랑

등록 2010-01-10 21:59

‘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
‘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
[김혜리의 카페 뤼미에르] ‘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
세상에는 도리 없이 시간이 걸리는 일들이 있다. 급행이나 지름길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숲과 같은 영역이 버티고 있다. 흔히 ‘치유’라 불리는 대부분의 과정이 그렇다. 이를테면 15년의 형기를 마친 여자가 사회로 복귀하는 일도 그중 하나다. 여섯 살 난 아들을 죽인 죄로 형을 살고 출감한 줄리엣(크리스틴 스콧 토머스)은 오래전 헤어진 여동생 레아(엘사 질베르스탱)의 집에 머물게 된다. 막 감옥을 벗어난 줄리엣은 묘지에서 되살아난 시체처럼 뻣뻣하다. 웃음기를 얹으려고 애쓸 때마다 그의 얼굴은 서툰 경련을 일으킨다. 자기를 둘러싼 세계에 대해 줄리엣이 최초로 취하는 능동적 행위는 창틀과 소파 쿠션을 어루만져 그 일상적 촉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가 가장 편하게 느끼는 장소는 말하는 능력을 잃은, 동생의 시아버지가 책을 읽는 서재다. 거리로 나선 여자는 그리웠던 카페 소음에 묻혀 커피를 홀짝이고, 닫힌 몸을 일깨우려는 듯 거기서 만난 모르는 남자와 일회성 섹스를 나눈다. 예술의 권능도 끼어든다. 지금은 잊혀진 화가가 매장(埋葬)의 풍경을 그린 슬픈 그림 앞에 멈추어 섰을 때, 어린 조카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동안, 줄리엣의 얼굴에는 표정이 살아난다. 그러나 구직을 돕는 봉사자가 새삼 범죄 동기를 물을 때 여자는 이제 와서 말할 것 같으냐고 일축한다. 호감을 품은 남자가 어깨에 손을 얹으려 하자 “아직 난 ‘멀리’ 있어요”라고 밀어낸다. 줄리엣이 소통의 능력을 회복하는 과정은, 통념과 달리, 감춰진 사연을 털어놓는 고백의 의례가 아니라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과 다양한 감각을 부활시키는 행동을 통해 이뤄진다.

<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에서 줄리엣이 과거에 저지른 범죄의 실체는 한동안 언급되지 않는다.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끝까지 유예된다. 마침내 수수께끼가 풀렸을 때도 우리는 그것이 세부의 풍성함에 비해 군더더기에 불과하다는 감상을 품게 된다. 이 영화의 열의가 집중된 부분은 끔찍한 비밀이 아니라 그것을 머금은 채 견디는 인간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소설가 출신 신인 필리프 클로델 감독은, 관객이 (압축된 형태로나마) 인물이 통과하는 시간을 같이 버티는 영화가, 이 이야기에 적당한 매체라는 점에 주목했을 것이다. 영화는 묻는다. 당신은 겨울 벌판에 봄이 도래하기까지 지긋이 지켜볼 수 있느냐고. 그건 사랑을 요하는 일이다. 결국 줄리엣의 회생을 가능케 한 사람은, 돌아온 언니에게 공간과 관계를 마련해 준 다음, 다그치지 않고 기다린 여동생이다. 가족은 가장 열렬히 사랑하거나 진정한 사랑을 나누는 상대는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당신을 가장 오래 사랑하는 자다. 아마도 이 영화의 제목은 그런 뜻이리라.

김혜리 <씨네 21>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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