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일의 썸머
[김혜리의 카페 뤼미에르] 500일의 썸머
<500일의 썸머>의 내레이션은 처음부터 부득부득 강조한다. “이 영화는 러브 스토리가 아닙니다. 남자가 여자를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딱히 쿨한 영화로 보이려는 허세만은 아니다. 톰(조지프 고든레빗)과 서머(조이 데샤넬)가 나눈 500일을 통틀어 서머는 사랑에 빠진 적이 없다. 관객은 이 커플이 ‘결국 깨졌음’을 초장에 통보받는다. <500일의 썸머>는 철저히 남자의 관점에서 씌어진 연애실패기다.
<500일의 썸머>가 영리하게 착안한 지점은 다음 질문이다. 과연 연애의 오답이 도출되는 과정을 그린 영화도 로맨틱 코미디가 될 수 있을까? 사랑의 시행착오를 기록하면서도 용케 침울한 무드에 휘말리지 않은 점은 <500일의 썸머>의 값진 성취다. 일단 연애의 ‘무엇을’ 다룰 것인가에 있어 차별화한 <500일의 썸머>에게 다음 과제는 ‘어떻게?’다. 통상 로맨틱 코미디의 관객은 티격태격하던 남녀가 결국 운명적 사랑에 골인할 거라는 전제 아래 적대감이 사랑으로 변화하는 과정이 얼마나 창의적으로 전개되는지 품평한다. <500일의 썸머>의 경우, 정반대 방향에서 같은 숙제를 풀어야 한다. 톰과 서머가 성사되지 못하는 현실을 설득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감독과 작가는 대담한 형식적 기교로 참신함을 꾀한다. 엠피3의 셔플 단추를 누른 것처럼, 시간을 뒤죽박죽 재편한다. 연애의 추억을 보관한 서랍을 뒤집어엎은 양 무작위성을 가장하는 편집에는 사실 계산이 깔려 있다. 같은 농담이 만남의 초기와 말기에 끌어내는 대조적 반응을 병치하는 식이다. 이밖에도 많은 트릭이 동원된다. 화면을 분할하고, 뮤지컬과 애니메이션을 도입하고, 남주인공의 고뇌를 잉마르 베리만의 <제7의 봉인>과 <페르소나>에 대입한다. 그러나 연애의 실패를 ‘어떻게 보여줄지’에 공력을 쏟은 이 영화는 정작 톰과 서머의 감정이 ‘어떻게’ 어긋났는지는 충분히 묘사하지 않는다. (‘어떻게’는 ‘왜’와 다르다.)
이 영화에는 알랭 드보통의 책 <행복의 건축>이 등장한다. 남성 시점에서 연애의 곤혹을 분석한 같은 작가의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와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이 <500일의 썸머>에 영감을 주었다고 짐작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책과 달리 영화는 연애의 본질을 찌르는 데에는 이르지 못한다. 결론대로 사랑이 우연과 환상이라면, 어째서 운명이 아니고 실체가 아닌지를 방증(傍證)할 만한 일화와 통찰이 필요하다.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로서 대담한 소재를 선택하고 재기를 과시한 <500일의 썸머>는 좀더 집요해야 했다. 우리는 성공한 사랑보다 실패한 사랑에 대해 더 끈질기게 반추하고 반문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김혜리 <씨네 21>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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