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실한 나라의 이상한 팀 버턴
[김혜리의 카페 뤼미에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영화 <셜록 홈즈>가 냉소적인 탐정을 성룡풍의 액션 영웅으로 둔갑시키더니, 이야기를 아예 새로 쓰다시피 한 팀 버턴 감독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극장에 도착했다. <뮬란> <미녀와 야수>의 작가 린다 울버턴이 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각본은, 루이스 캐럴의 동명 원작과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담긴 요소를 발췌해 재구성한 판본이다. 영화에서 열아홉 살로 훌쩍 성장한 앨리스는 내키지 않는 결혼을 피해 어린 시절 방문했던 ‘이상한 나라’로 다시 빨려 들어가고 붉은 여왕의 공포정치에 대적해 모험을 벌인다. 결과적으로 팀 버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현실의 인물이 평행 우주로 건너가 그 세계의 메시아 노릇을 하는 <나니아 연대기>의 닮은꼴이 되었다. 여기엔 당찬 소녀가 사회적 인습이 요구하는 여성상을 거절하고 독립적 인간으로 성장한다는 디즈니 장편 애니메이션의 단골 서사도 정확히 포개진다. 이해 못할 결단은 아니다. 나열식 구성으로 고도의 언어 게임을 이어가는 캐럴의 원작을 판타지 대중영화로 각색하기 위해서는 모종의 변환이 필요했을 터다. 정말 이상한 일은 매우 대담한 각색까지 무릅쓴 이 영화가 층분히 팀 버턴스럽지도 않다는 점이다. 동시에 존재하는 이질적인 두 세계를 가로질러 여행하는 이야기는 본디 팀 버턴의 장기다. 게다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원더랜드는 뛰어난 콘셉트 아티스트인 팀 버턴이 활개 칠 놀이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팀 버턴의 추종자들에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낯설고 심심하다. 왜일까? 우선 전선(戰線)이 달라졌다. 팀 버턴의 비전은 모나고 그로테스크한 존재들이 정상적이고 ‘예쁜 것들’을 덮치는 난장에 있었다. 그것은 결코 붉은 여왕과 하얀 여왕이 펼치는 것과 같은 선과 악의 전투가 아니라 정상성과 비정상성의 전면적인 조우였고, 카니발에 취한 세계와 카니발을 금지하는 세계의 충돌이었다. <가위손>의 고딕풍 고성이 청결한 교외 주거지를, <빅 피쉬>의 환상이 현재를, <유령신부>의 사후세계가 이승을 향해 넘실거렸던 것과 달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원더랜드는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현실을 위협하지 않으며, ‘이상한 나라’의 주민들조차 착한 편과 나쁜 편으로 깔끔히 갈려 깔끔한 승부를 낸다. 정원수를 조각하든(<가위손>), 삼류영화를 만들든(<에드 우드>), 거짓 이야기를 지어내든(<빅 피쉬>), 창작 행위를 통해 소외와 싸우는 팀 버턴의 주인공들은 근본적으로 예술가들이었다. 그러나 앨리스는 예언에 적힌 운명을 착실히 수행할 뿐이다. 그의 이상한 나라 여행은 정상성의 세계를 더욱 건강하게 운영하는 밑거름이 되고 만다. 유용하고 교훈적인 모험, 그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팀 버턴한테서는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이다. 김혜리 <씨네 21> 편집위원 ※ 이번호를 끝으로 ‘김혜리의 카페 뤼미에르’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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