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언 에듀케이션〉
[남다은의 환등상자] <언 애듀케이션>
성장영화라는 장르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만큼 따스하지 않다. 순간의 일탈에 따르는 대가는 대체로 잔인하고, 그 잔인함 속에서 주인공이 배우는 것은 대개의 경우 포기하는 법이다. 혹은 일탈의 경험을 과거의 기억으로 봉인하는 법이다. 때때로 그런 영화들은 호러보다 무섭고 비극적 멜로보다 슬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공포와 슬픔을 성장이라는 말로 대체한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여전히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현실에서 두려움에 떨 때에도 그 두려움을 ‘성장’이라는 말로 닫아버리려는 욕망은 무엇일까? ‘성장’이라는 단어를 과거완료형 속에 가두는 우리들은 무엇을 망각하려고 애쓰는가. <언 애듀케이션>을 보면 또다시 그런 생각이 든다. 이 영화를 가장 진부하게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다. ‘촉망받던 소녀가 어느 날 갑자기 옥스퍼드 대학이 아닌 한 남자의 세계에 빠져버린다. 모든 걸 버리고 그와의 결혼을 결심하지만, 남자는 알고 보니 유부남이었다.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소녀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 옥스퍼드 대학에 진학한다.’ 이런 줄거리를 앞에 두고 좌절과 고통이 비로소 성장의 밑거름이 된다는 식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건 지루하고 무의미하다. 정작 흥미로운 지점은 영화 속 소녀의 선택과 변화를 따라가면서 우리의 마음이 어디로 기울거나 향하는지를 보는 것이다. 당신은 왜 소녀를 연민하는가, 혹은 비난하는가. 소녀의 지난 선택이 실수라면, 그건 소녀가 그 남자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철없는 사랑에 빠졌기 때문은 아니다. 소녀의 실수는 제도에서 벗어난 자율적 욕망의 추구가 실은 남자가 제공해준 자본의 향락과 동일한 것임을 모른 체했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소녀가 꿈꾸는 영혼의 자유가 실은 계급적 취향의 산물이었다는 것. 소녀는 남자가 자신이 경멸하는 제도의 중심에 철저히 기생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너무 늦게 대면했다. 언젠가는 실패가 예정된 선택이었다. 하지만 허영심의 발로였든, 허기짐의 결과였든, 일탈의 여정이었든 간에, 이 모든 충만한 욕망과 갈증을 버린 후, 옥스퍼드에서 맞이하는 안정된 결말은 어쩐지 기쁘지 않다. 과거를 돌아보는 그의 성숙한 내레이션은 어쩐지 기만과 체념 같다. ‘지금 여기만 아니라면’을 열망한 자들은 결국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여인처럼 비극적인 파국을 맞이하거나 <언 애듀케이션>의 소녀처럼 자기 부정을 거치고서야 살아남는가. 이럴 때, 성장이란 완벽한 상실을 위로하기 위해, 혹은 망각하기 위해 고안된 단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수많은 소설과 영화의 화려한 수사들 속에서 ‘성장’이란 말에 드리워진 낭만을 거둘 때가 되었다. 남다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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