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지웅의 극장뎐 / 좀비영화의 원형을 찾으면서 굳이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건 무의미한 작업이다. 차라리 <지상 최후의 사나이>를 끄집어내는 게 낫다(정작 이 영화는 원작처럼 흡혈귀를 다루고 있지만). 현대 좀비영화의 원형을 제공한 건 조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다. 그는 이 영화에서 몇 가지 공식을 만들어냈다. 좀비는 군집을 이루어 활동한다는 것, 좀비는 살아있는 인간을 섭취한다는 것, 좀비는 전염성이 있다는 것. 그런 와중에도 조지 로메로는 좀비가 발생하게 되는 원인에 대해 유독 함구했다. 그는 이와 관련된 어떤 종류의 논란에도 말을 섞으려 하지 않았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의 주인공이 왜 흑인이냐는 시시껄렁한 질문에 대해서는 굳이 대답을 하면서도 말이다. 사람들은 궁금했다. 군 실험 때문일까. 핵 공격 때문일까. 환경오염 때문일까. 그러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지 로메로가 좀비 이야기를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재난의 원인이 아니라, 재난을 돌파하는 인간들의 추잡한 표정이었다. <코드명 트릭시>로도 알려져 있는 1973년작 <분노의 대결투>(원제 <미친놈들>)는 조지 로메로의 작품목록에서 꽤 이례적인 작품이다. 앞서 설명했듯 그는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구축하는 데 있어서 파국의 원인을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재난이 있고, 그것을 야기했음에도 정보를 통제하는 정부가 있으며, 통제된 정보로 인해 무력하게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는 개인들이 존재한다. <크레이지>는 <분노의 대결투>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조지 로메로가 직접 기획과 제작을 맡았다. 영화는 원작의 골격을 비교적 충실히 복원해낸다. 연출은 멀끔하고 제대로 계산돼있다. 브렉 에이즈너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화면 어디에 두고 호흡을 자르면 될지 확실히 아는 감독이다. 최소한 이번 작품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이미 유사한 이야기가 너무 많다는 게 문제다. <분노의 대결투>의 기본적인 전개 양상은 이후 쏟아져 나온 바이러스 재난 영화들을 통해 거듭 되풀이된 바 있다. 그렇다면 <크레이지>는 지금 이 시간대의 관객들에게 어떤 감흥을 전해줄 수 있을까. <분노의 대결투>는 베트남 종전 직전 군사 권력에 관련한 사람들의 불신이 극점에 달했을 때 등장한 영화다. 지금 우리 앞에 던져진 <크레이지>는 어느 누구도 의도하지 못했지만 놀랍게도 천안함 사고를 환기시킨다. 모두가 거짓말인 걸 알고 있고, 거짓이 거의 매일 실시간으로 공적인 번복을 통해 증명되고 있다. 그러나 제한된 정보 앞에 결국 침묵하고 끔찍한 죽음을 무력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런 개인들의 비극이 스크린의 안과 밖에서 어울려 공명한다. 우리는 영화를 살아나가고 있고, 영화는 그것을 주워 다시 담아낸다. 미친놈들.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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