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인드 사이드’
[남다은의 환등상자] 블라인드 사이드
아무리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영화는 어쨌든 영화다. 전자는 실제 현실이고 후자는 허구라는 구분을 하려는 게 아니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실제 인물들의 삶이 감동적이라면, 그들의 삶을 형상화한 영화도 필연적으로 감동적인가? 현실 속 누군가의 선택과 결단에 기꺼이 동조하는 것은 그 삶의 과정을 다룬 영화에 대한 동의로 반드시 이어지는가? 때때로 사람들은 실화의 ‘진정성’이 작품성과는 별개로 영화의 ‘진정성’만큼은 보증한다고 믿는다. 그때, 실화를 옮긴 영화에 대한 비판은 실제 인물의 삶에 대한 비판으로 여겨진다. 물론 잘못된 논리다. 우선 진정성이라는 단어를 무한히 신뢰하는 사람들 중에서 그것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자들을 본 적이 없다. 무언가의 윤리 혹은 가치를 판단하는 근본적 기준인 것처럼 사용되지만, 실은 무척 모호한 단어다. 만약 진정성이라는 것이 있다고 해도, 그건 구경꾼의 입장에서 그리 쉽게 판단할 만한 문제가 아니다. 더욱이 그 어떤 감독도 진심 없이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는 점에서라면 모든 영화에는 진정성이 있다. <블라인드 사이드>를 보면서 드는 의문도 위와 같은 것이다. 버려진 하층민 흑인 소년이 우연히 만난 너그러운 백인 상류층 가정에 입양되어 풋볼선수로 거듭난다는 내용은 할리우드 가족 성장 드라마의 비교적 익숙한 변주다. 백인 상류층의 환상을 반영한다거나 미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개인화시켰다는 비판도 예측 가능하다. 그런데 막상 영화(허구)가 끝나고 실제 주인공들의 사진(사실)이 나열되는 순간 이 영화의 어떤 불편함에 대해 편히 말할 수 있는 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금발의 날씬한 백인 엄마와 거구의 흑인 아들의 포옹, 즉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시각적 대립 이미지의 선정성이 실제 사진을 통해 반복될 때, 실화의 무게는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해버린다. 이 선명한 계급적, 인종적 간극을 평화롭고 세련되게 메우는 이야기가 누군가의 희망이나 위선이 아니라 누군가 실제로 행한 일이라는 사실은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만약 그 순간 감동을 느낀다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될 일이다. 어느 자애로운 상류층 보수주의자 백인 가족과 하층민 흑인 소년이 이뤄낸 화합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과정의 영화적 재현까지 당연하게 긍정해야 하는 건 아니다. 이를테면 <블라인드 사이드>를 보며 이 영화의 장치들이 우리로 하여금 영화 속 어떤 인물의 위치에 서도록 만드는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 혹은 타자를 재현하는 영화의 시선(주체의 인식 틀을 넘어서지 않고 위협적이지 않은 길들여진 타자의 형상)에 대해 문제제기를 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다소 가혹하게 느껴질지라도 현실 속 어떤 삶을 존중하는 것과 그 삶을 소재로 한 영화를 끌어안는 건 전혀 다른 문제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남다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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