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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컴의 면도날로 배후를 베다

등록 2010-04-25 17:53

오컴의 면도날로 배후를 베다
오컴의 면도날로 배후를 베다
허지웅의 극장뎐 /

요즘 들어 부쩍 오컴의 면도날이 자주 회자된다. 오컴의 면도날은 여러 가지 가설이 세워졌을 때 개연성이 부족한 주장을 배제하고자 하는 태도를 의미한다(프란체스코회 수사였던 오컴의 윌리엄에 대해 개인적인 관심이 동한 독자에게는 <장미의 이름>을 추천한다. 극 중 윌리엄 수사가 오컴의 윌리엄을 모델로 한 캐릭터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정부와 국방부의 장황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천안함 사고 관련 해명을 오컴의 면도날로 잘라내고 싶은 모양이다.

사실 오컴의 면도날은 자주 인용해 써먹을 만한 게 아니다. 그것은 법칙이 아니다. 오컴의 면도날로 소외된 가설이 해답일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조디 포스터는 <콘택트>에서 과학자로서 (종교를 비롯한) 신비주의적 관점을 배격하기 위해 오컴의 면도날 이야기를 언급한다. 그러나 극의 결론에 이르러 오히려 그녀 스스로가 오컴의 면도날에 의해 공격받는 상황에 처한다. 그녀가 우주에서 경험한 복잡한 진실을 명쾌하게 설명해낼 수 있는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콘택트>를 매우 정교하고 아름다운 에스에프 영화로 기억할 수 있는 건 바로 이런 아이러니를 동원한 성찰 덕분이다.

그러나 현 상황에서 사람들이 오컴의 면도날을 거론하는 맥락에는 상당한 합리가 발견된다. 오컴의 면도날이 효력을 얻는 순간은 주로 음모론을 차단할 때다. 음모론은 큰 반향을 일으킨 사건의 원인을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할 때, 배후에 거대한 권력 혹은 단체가 작동하고 있다는 인식 아래 만들어진다. 문제는 국방부의 규명 과정과 정부의 대응 방안이 이미 그 자체로 음모론으로서의 자질을 모두 갖추고 있다는 데 있다.

우리가 천안함 관련 뉴스를 지켜보며 흡사 네스호의 괴물 이야기를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네스호에 괴물이 있다는 굳건한 확신 아래 증거를 찾는 것과, (그것을 부정하는 수많은 과학적 정황들에도 불구하고) 어뢰 혹은 기뢰로 인한 폭발이라는 명제 아래 이를 설명해줄 수 있는 증거를 찾아 헤매는 풍경은 정확히 겹쳐진다. 그것은 규명이 아니라 신비주의다. 여기에 인간 어뢰 혹은 북한의 레이저 신무기를 언급하는 소위 정론지들의 브레인이 더해지면 대한민국의 정부와 언론은 검은 두건을 뒤집어쓴 오컬트 집단으로 돌변한다.

모든 일의 배후에 북한을 두고 싶어 하는 종교적 신념과, 그런 종교적 신념이 유지되어야만 생명력을 보장받을 수 있는 정치적 셈이 맞물려 실체를 규명하기보다 미스터리를 양산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불필요한 상상력을 배재하고 정황 증거와 합리를 동원해 사건을 규명하고자 하는 쪽은 오히려 그냥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다. <콘택트>에서 오컴의 면도날이 양날이라는 걸 실감했던 조디 포스터조차, 이런 상황에서라면 어디에 날을 휘둘러야 할지 판단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허지웅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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