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하하하’
홍상수 10번째 영화 ‘하하하’
때는 어느 해 가을. 장소는 서울 남쪽 청계산 자락. 두 남자가 막걸리잔을 기울이고 있었으니, 조문경은 마마보이, 허풍선이 활동사진 감독 지망생이고, 조문경이 선배로 받드는 방중식은 조강지처를 제쳐두고 비행기 승무원과 죽고 못 사는 활동사진 평론가였더라. 홍상수 감독의 열번째 장편 <하하하>는 두 여행자가 통영에서 경험한 사랑이야기다. 영화의 묘미는 술이다. 술잔이 거듭되면서 화자들의 목소리는 술기운처럼 불콰해지고, 그들의 이야기는 절정을 향해 치닫는다. 하지만 주저리주저리 토막난 이야기를 따라가려면 가끔씩 머리를 흔들어 취기를 털어내야 한다. 그들과 함께 취기가 오르기 때문.
시인묵객 우러르는 통영서 미묘하게 얽혀든 관계들
즉석대본·취한 연기 ‘백미’…칸 영화제 비경쟁부문 초청 조문경(김상경)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소. 북가주(캘리포니아)의 사진관 일을 위해 서울을 떠나기에 앞서 복국집 주모를 하는 엄마(윤여정) 젖을 더 먹으러 내려갔더라. 여비와 생활비를 왕창 울궈낼 심산도 뻔히 보이지 않겠는가. 그곳에서 어정어정 빈둥빈둥 소일하다 문화유산해설사 왕성옥(문소리)의 매초롬한 종아리에 눈이 뒤집혔더라. 왕성옥은 누구뇨. 전남편과 헤어진 뒤 시인묵객 강정호(김강우)와 사귀는 변덕쟁이더라. 왕성옥의 눈에 문경은 허우대 멀끔하고 “활동사진 감독이다”라고 하니 손해날 게 없지 싶어 귀가 솔깃하였더라. 이어서 방중식(유준상)을 따라가 봅시다 그려. 비행기 승무원 안연주(예지원)의 휴가에 맞춰 시인 후배 강정호가 있는 통영을 찾아갔더라. 고층주막에 짐을 풀고는 참깨들깨 기름 냄새에 운우지락을 즐기는데 차마 보기 힘들 지경이라. “언제까지 숨어 지내야 하느냐”는 정부 연주의 하소연에 강정호의 안내를 받아 복국집, 시 낭송회 등을 돌며 그곳 사람들과 교유하였더라.
왕어색 커플과 닭살 커플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또다른 숨은 그림이 드러난다. 강정호를 사이에 둔 왕성옥과 노정화(김규리)의 삼각관계가 그것. 강정호는 왕성옥을 따라 통영으로 내려온 가난뱅이 시인이고 노정화는 외국계 회사의 사장 비서로 코쟁이 사장의 구애를 외면하고 강정호를 바라본다. 강정호는 중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게 아니라 이러고도 저러고도 다한다. 이런 관계가 가능한 것은 통영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통영은 어떤 곳이뇨. 청정 바다를 끼고 구릉지에 자리잡은 그림 같은 도시. 바람 좋고 햇볕 좋고 인심 좋은 곳이라. 바닥이 워낙 좁아, 옆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 정도더라. 유서와 전통도 깊으니, 저 임진난 때 왜구를 벌벌 떨게 한 성웅 이순신을 여래처럼 받들고 불세출의 소설가 박경리와 남북한 공히 위대한 음악가로 숭앙하는 윤이상을 협시보살로 모시는 별천지더라. 당연히 시인과 묵객을 우러르지 않을 텐가.
영화에는 퍼즐그림 외에 또다른 비밀이 있다. 고유명사, 대명사, 명사로 인한 착종. 무슨 말인고? 사람들은 보통 여행담, 특히 취중 이야기에서 언제, 누구 또는 무엇을 지칭할 때 보통명사를 쓴다는 것. 예컨대 아는 ‘비 오던 날 오후’, ‘시인 후배’, ‘종아리가 예쁜 여자’ 등. 다음에는 ‘그날’, ‘그 친구’, ‘그 여자’로 바뀌게 마련. 조문경과 방중식이 복국을 먹은 곳은 호동식당이 아니라 그냥 복국집, 그들이 만난 통영사람 강정호는 시인 후배 또는 그 여자의 애인, 왕성옥은 시인 후배의 또다른 애인 또는 문화유산해설사다. 시차를 두고 같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두 이야기에서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등장하는 속내이다. 관객은 다 아는데 두 사람은 전혀 모르는 상황으로 감상 초기에는 헷갈리지만 곧 흐뭇해진다. <하하하>는 애주가 홍 감독이 그날그날 내주는 대본에 따라 소주와 맥주를 마셔가며 찍은 영화. 혀가 살짝 풀린 배우들의 눈빛과 걸음걸이 또한 아주 자연스럽게 흔들린다. 칸에서 이 작품을 부른 것은 아마도 하하, 실실 속에 숨은 허허실실에 반해서지 싶다. 5월 5일 개봉.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즉석대본·취한 연기 ‘백미’…칸 영화제 비경쟁부문 초청 조문경(김상경)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소. 북가주(캘리포니아)의 사진관 일을 위해 서울을 떠나기에 앞서 복국집 주모를 하는 엄마(윤여정) 젖을 더 먹으러 내려갔더라. 여비와 생활비를 왕창 울궈낼 심산도 뻔히 보이지 않겠는가. 그곳에서 어정어정 빈둥빈둥 소일하다 문화유산해설사 왕성옥(문소리)의 매초롬한 종아리에 눈이 뒤집혔더라. 왕성옥은 누구뇨. 전남편과 헤어진 뒤 시인묵객 강정호(김강우)와 사귀는 변덕쟁이더라. 왕성옥의 눈에 문경은 허우대 멀끔하고 “활동사진 감독이다”라고 하니 손해날 게 없지 싶어 귀가 솔깃하였더라. 이어서 방중식(유준상)을 따라가 봅시다 그려. 비행기 승무원 안연주(예지원)의 휴가에 맞춰 시인 후배 강정호가 있는 통영을 찾아갔더라. 고층주막에 짐을 풀고는 참깨들깨 기름 냄새에 운우지락을 즐기는데 차마 보기 힘들 지경이라. “언제까지 숨어 지내야 하느냐”는 정부 연주의 하소연에 강정호의 안내를 받아 복국집, 시 낭송회 등을 돌며 그곳 사람들과 교유하였더라.
영화 ‘하하하’
영화에는 퍼즐그림 외에 또다른 비밀이 있다. 고유명사, 대명사, 명사로 인한 착종. 무슨 말인고? 사람들은 보통 여행담, 특히 취중 이야기에서 언제, 누구 또는 무엇을 지칭할 때 보통명사를 쓴다는 것. 예컨대 아는 ‘비 오던 날 오후’, ‘시인 후배’, ‘종아리가 예쁜 여자’ 등. 다음에는 ‘그날’, ‘그 친구’, ‘그 여자’로 바뀌게 마련. 조문경과 방중식이 복국을 먹은 곳은 호동식당이 아니라 그냥 복국집, 그들이 만난 통영사람 강정호는 시인 후배 또는 그 여자의 애인, 왕성옥은 시인 후배의 또다른 애인 또는 문화유산해설사다. 시차를 두고 같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두 이야기에서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등장하는 속내이다. 관객은 다 아는데 두 사람은 전혀 모르는 상황으로 감상 초기에는 헷갈리지만 곧 흐뭇해진다. <하하하>는 애주가 홍 감독이 그날그날 내주는 대본에 따라 소주와 맥주를 마셔가며 찍은 영화. 혀가 살짝 풀린 배우들의 눈빛과 걸음걸이 또한 아주 자연스럽게 흔들린다. 칸에서 이 작품을 부른 것은 아마도 하하, 실실 속에 숨은 허허실실에 반해서지 싶다. 5월 5일 개봉.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