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
순수한 노파-끔찍한 현실 대비
“이 시대에 시는 무엇인가” 물어
“이 시대에 시는 무엇인가” 물어
이창동 감독 ‘시’ 검게 꿈틀거리는 화면. 가까이 들이댄 카메라가 각도를 서서히 올려 물가에서 노는 아이들을 잡고서야 비로소 강물인 줄 안다. 상류에 점처럼 보이던 것이 가까이 흘러내리면 카메라는 위로 쳐들려지고 엎드린 채 둥둥 뜬 소녀의 모습이 내려다보인다. 이창동 감독의 작품 <시>는 짐짓 어렵고 까탈스러울 것 같지만 출발은 뜻밖에 평범하다. 영화는 문화센터에서 시 쓰기를 배우는 60대 노파 손미자(윤정희)가 맡아서 기른 중학생 손자(이다윗)가 일으킨 성폭행 사건을 뒤처리하고 이를 소재로 한편의 시를 완성해 유서처럼 남기는 과정을 잔잔하게 훑어간다. 문화센터 강사 김용탁(김용택) 시인을 통해 시란 무엇인가, 시상을 어떻게 얻는가 등을 이야기하고, 시낭송 모임 활동을 통해 시가 유통되는 현장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영화는 시의 아름다움과 시를 쓰려는 노파의 순수함, 그리고 끔찍한 범죄와 이를 덮으려는 우리 사회의 뻔뻔함을 선명하게 대조시키면서 묻는다. “이 시대 시는 무엇인가. 시 쓰기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감독이 노파의 시작과정을 통해 말하는 시는 현실에의 지극한 관심을, 추체험을 통해 대상과 일치시키고, 자신의 온몸을 투영하여 이를 시어로 녹여내는 것을 말하지 않을까. “그곳은 얼마나 적막할까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좋아하는 음악 들려올까요//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랫소리 들리고/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을까요/ 한 번도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을까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아네스의 노래’ 중에서) 영화는 끝에서 다시 시의 후렴구처럼 처음 장면을 변주·반복한다. 충격적 반전도, 그 흔한 배경음악도 없는 <시>는 영화라기보다 한편의 시라고 하는 편이 옳다. 임종업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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