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 영화제 소식
이란 출신의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63회 칸 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작 <서티파이드 카피(certified copy)>. 프랑스 배우 줄리에트 비노쉬, 영국의 성악가 윌리엄 쉬멜 주연.
간단히 말하면 영화는 이탈리아 남부의 작은 도시인 토스카니에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는 이야기다. 남자는 40대 중후반의 영국인 미술사 관련 저술가. 여자는 프랑스 출신으로 그곳에 정착해 화랑을 운영하는 중년 여성이다.
덩그라니 빈 마이크 두 개와 이탈리어판 책 <서티파이드 카피>.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는 것이 한장의 사진 같다. 하지만 조금 있자니 왼쪽에서 퉁퉁한 얼굴 하나가 추가돼 말이 나오면서 영화임을 안다. “그는 교통체증 때문이라고 변명을 하지 못한 것이다. 위층의 아파트에 묵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얘기하는 사람은 영문판 저서를 이탈리아어로 번역한 역자. 화면은 몇개의 예약석이 빈 강의실 전경을 비추고 이어서 잠시후 뒷문으로부터 머리가 희끗한 중년 남자가 아타난다. 저자다. 이어서 역자 옆에 한 여성이 비추고 이어서 아이 하나가 여자한테 다가온다.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는 수화 같은 이야기를 나눈다. 저자 윌리엄 쉬멜은 카피와 진짜에 관한 정의에서부터 ‘서티파이드’의 어원을 설명하는 것으로 자신의 저서에 관한 강의를 한다. 로마시대, 중세시대를 비롯해 앤디 워홀에 이르기까지 인증된 모작의 역사를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이 영화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미술사학에 관한 내용인가 보다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중간에 중년 여성이 일어나 밖으로 나오고 여성은 아이와 함께 빵집으로 간다. 여성과 아이는 빵집에 마주 앉아 있는데, 아이는 휴대용 게임기에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 여성한테 계속 말을 시킨다. 왜 서티파이드 카피 책을 6권이나 샀는가. 누구한테 줄 것인가 등등을 묻는 품이 무척 되바라져 보인다. 알고보니 이들은 엄마와 아들. 그들의 이야기 가운데 윌리엄 얘기가 언뜻 나오는 것으로 보아 엄마와 윌리엄이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루하게 영화의 머리부분을 이야기하는 것은 장면 장면들 속에 영화의 단서들이 상징적으로 들어있기 때문이다.
잠시 후 화면은 문을 열고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천천히 내려오는 윌리엄이 보인다. 계단을 다 내려오자 여기저기 조각품이 보이면서 작은 화랑임을 짐작하게 한다. 그것을 돌아보는 윌리엄이 전화통화하는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주인을 찾고 잠시후 목소리의 주인이 나타나는데 그는 다름 아닌 저자 강연회에서 앞자리에 앉아있던 여성이다. 커피를 줄까 하는 말을 하다가 밖에서 미팅을 하자는 말에 윗도리를 걸치고 함께 밖으로 나온다. 여성은 먼 곳에서 온 저자를 접대하기로 한 그곳의 여성 오피니언 리더인 것으로 보인다. 자동차를 끌고 나와 우물쭈물하다가 이들이 가는 곳은 전망이 좋은 한 마을로 교회를 중심으로 건물들이 올망졸망 들어선 오래된 마을이다. 차를 타고 오면서 서티파이드 카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서로의 같고 다른 생각들을 하나하나 맞춰본다. 영낙없는 손님과 접대자의 관계다.
이들은 마을의 작은 미술관을 거쳐 한 음식점을 들어가게 되는데, 남자가 잠시 전화를 하러 나간 사이 윌리엄을 남편으로 착각한 음식점 여주인과 여성 사이에 남편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남자는 영어만을 말하고 이탈리아에 머무는 프랑스인이 남편 나라의 말을 하는 것, 남자가 결혼해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하느니 등등의 얘기를 한다. 이쯤에서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도대체 무엇인가를 갸우뚱하게 한다. 하지만 남자가 들어오자 여자는 여주인의 착각을 교정해주지 않았을 뿐이라고 변명한다. 이들은 그곳을 나와 교회, 광장, 펜션 등을 차례로 옮겨가게 되면서 아마도, 남자가 10여년 전 이탈리아에 여행을 왔다가 현재 그들이 차례차례로 밟아가는 장소를 여행을 했고 이어서 하룻밤 사랑을 했던 사이일 것이라는 추정을 하게 만든다. 단지 추정일 뿐 진실은 무엇인지 모른다.
영화는 점층적인 구조로 사연이 밝혀지는, 혹은 관계가 발전하는 구조로, 언제 어디서나 있을 법한 남녀의 사랑 이야기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인지 상상인지 알 길이 없는 것이 남자는 9시 기차표를 예약해둔 상황이다. 여행처럼 끝이 정해진 관계라는 것.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토스카니는 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로 돌길이 미로처럼 나있고 작은 미술관과 음식점과 술집, 펜션이 있는 곳을 벗어나면 올리브 농원이 있고 드문드문 포플라 나무들이 삐죽 튀어나와 있는 것이 자연스럽게 남자와 여자가 가까워질 수 있는 곳이다. 실제로 잊고 있지만 우리는 누군가와 작은 인연이 있고, 그 기억은 작은 계기로 인해 밑바닥에서 스멀스멀 기어올라올지도 모른다. 여주인공은 매미와 사촌지간인 잠자리 목걸이를 하고 있다. 단 하루 울음으로써 암컷을 불러 자신의 카피를 남기기 위해 8년을 땅 속에서 지낸다는 곤충이다.
자! 이 대목에서 서티파이드 카피는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자. 20세기까지 진품으로 대접받아온 18세기 그림이 있다고 치자. 그것은 진품인가. 모조품인가. 한 미술관은 그 작품이 모조품으로 밝혀진 다음에도 오리지널보다 뛰어난 진품으로 간주해 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또 디엔에이의 복제를 통해 종족을 보존해온 현생 인류는 오리지널로 인정되는 카피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부모와 자식은 인증된 카피의 관계. 남녀는 어떤가. 굳이 성경을 이야기 하지 않더라도 성염색체중 하나만 다른 완전한 카피가 아닌가. 우리가 가진 기억 역시 현실이라고 인증된 카피일 터. 그런 의미에서 가짜라는 의미의 카피는 없다. 혹시 그 존재가 인정된다고 해도 인증된 카피만 존재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감독이 붙인 제목은 영화의 플롯처럼 중층, 점증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셈이다.
압바스 감독은 여주인공 줄리에트 비노쉬를 캐스팅할 때 그를 만나 45분동안 영화의 내용과 흡사한 자신의 사랑이야기를 말해줬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당신은 나를 믿느냐?고 묻고 그렇다고 답하자 사실이 아니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추정컨대 여성 편력이 많은 압바스 감독의 자전적인 얘기가 아닐까 싶다. 실제로 그는 <체리향기>(1996),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1999)가 각각 칸 황금종려상, 베니스 감독 그랑프리를 수상하면서 명성이 높아지자 사생활이 흐트러졌다고 전한다. 2001년 이후 만들어진 영화는 작품성이 떨어지는 편이라는 평이다. 그의 영화는 <체리향기>, <바람이 우리를> 외에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1992), <올리브나무 사이로>(1994), 한국에 수입상영된 바 있다.
임종업 기자
임종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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