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영화·애니

이제는 이별해야 할 ‘로스트’와 ‘24’

등록 2010-05-23 22:19

이제는 이별해야 할 ‘로스트’와 ‘24’
이제는 이별해야 할 ‘로스트’와 ‘24’




허지웅의 극장뎐 /

마지막을 끝내 읽지 않고 남겨두는 책이 있다. 책을 읽는 내내 가졌던 기대를 작가가 배신할까 싶어 그러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내 감정을 챙길 만큼 여유로운 사람들은 마지막 페이지를 열어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읽기를 포기할 만큼 주저하는 사람들이 정말 염려하는 건 이야기의 마지막이 아니라 이별의 시작이다. 그렇다. 이별의 감정을 갖게 만드는 이야기들이 정말 있다. 물론 매우 드문 일이다. 그래서 늘 어렵다.

지난 수년 동안 이어온 드라마 두 편이 종영한다. <로스트>가 하루 먼저, 그리고 다음날 <24>가 끝난다. 잭 셰퍼드와 잭 바우어의 여정도 여기까지다. 언제나 놀랄만한 다음을 기약했던 그들은 이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올해 초 오바마 대통령은 당초 2월2일이었던 새해 첫 연설 일정을 조정했다. <로스트>의 마지막 시즌 프리미어 때문이었다. 여태 뿌려놓은 떡밥을 결코 처리하지 못할 것이라 여겨졌던 <로스트>는 마지막 시즌에 이르러 그 모든 의혹과 음모를 대부분 주워담는 데 성공했다. 이 드라마는 등장인물 모두에게 역사와 체온을 선사했고 에피소드 전편에 걸쳐 최선의 완성도를 유지하는 데 긴장을 잃지 않았다. 신비주의부터 시간여행에 이르는 가능한 모든 수의 장르 소재를 시험하면서도 구원과 선택, 운명과 예정, 그리고 거대 담론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사람들의 표정 안에서 문학적인 깊이를 구현해냈다. 이전의 어떤 드라마도 장르의 힘을 빌려 이만큼 영혼의 본질에 대해 도발적으로 접근한 일이 없다. <로스트> 이후 어떤 것도 <로스트> 같지 않을 것이다.

잭 바우어는 마지막 시즌에 이르러 테러리스트가 됐다. 어쩌면 예정된 일이었다. <24>의 외연은 테러리스트에 맞서는 특수요원의 분투를 다룬다. 그러나 실제로는 국가적인 규모의 대의를 위해 삶을 희생해온 남자가 바로 그 대의 때문에 주변을 포함한 모든 걸 잃기를 반복하면서 고통스러워하는 이야기다. 여덟 개의 시즌을 거치면서 그는 아내를 잃었고 아버지와 형으로부터 배신당했으며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바로 이전 시즌까지 이제 한 줌도 채 남지 않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건사해내기 위해 테러리스트와 싸웠다. <24>의 마지막 시즌은 잭 바우어에게서 그나마 남아있는 관계조차 앗아간다. 그가 다른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우리 시대 가장 비극적인 국가주 마초 영웅의 마지막은 스스로 옳다고 믿었던 모든 것을 회의하는 방식으로 치러지고 있다.

그래서, 이제 안녕을 말할 때다. 여전히 이 이야기들의 끝을 확인해야 할지 아니면 그냥 남겨두어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지막을 읽지 않고 남겨둔 모든 이들이 그러하듯, 그 페이지들은 언젠가 펼쳐질 것을 기약하고 있기에 봉인될 수 있는 것이다. 그때가 내일일지 내년일지 먼 훗날일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어찌 됐든 지금은 떠나보내야 할 때다. 안녕 잭.

허지웅 영화칼럼니스트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