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유령작가’
[남다은의 환등상자] 유령작가
<유령작가>에 대한 평들이 공통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내용은 감독 로만 폴란스키의 개인사, 그리고 이 영화가 노골적으로 지시하는 미국 중심의 현실정치다. 영화와 감독의 개인사를 겹쳐서 보는 건 대개 신중해야 하는 일이지만, 몇 십 년 전 지은 죄로 2009년 스위스에서 미국 경찰에 체포되어 여전히 구금중인 폴란스키의 처지는 <유령작가>의 면면들과 교차되는 게 사실이다. 게다가 영화 속에서 전 영국 총리로 나오는 아담 랭(피어스 브로스넌)이 토니 블레어를 상기시키고 이라크전을 일으킨 미국에 대한 조롱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는 점은 분명 미국에 대한 폴란스키의 발언이다. 그는 우회하지 않고 비교적 직설적으로 이 스릴러를 자신의 현실과 현재의 세계정세 속에 위치시킨다. 그걸 현란한 편집기법이 아니라 우아하고 고전적인 방식으로 펼쳐냈다는 점도 여러 평자들의 찬사를 받은 바 있다. 그러니 위의 논의들을 반복하기보다는 ‘유령작가’라는 정체성을 중심에 두고 이 정치스릴러를 다시 생각해보는 편이 흥미로울 것 같다.
유언 맥그리거가 연기한 주인공(이름은 제시되지 않는다)은 사건의 외부에서 진실을 밝히는 탐정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건에 개입된 내부 고발자도 아니다. 그는 다만, 유령작가다. 그는 아담 랭의 자서전을 대필하다 갑자기 죽은 전임자 맥아라의 후임으로 선택되었고 이제 그가 할 일은, 이 논쟁적인 정치인의 자서전을 잘 팔리는 ‘이야기’로 꾸며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아담 랭이 구술하는 사건들 사이의 틈이 납득되지 않아도, 그 틈을 일관되게 메우는 게 그의 일이지, 그 틈을 추리하는 건 그의 역할이 아니다. 유령작가는 결코 탐정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그가 들은 것들을 옮기는 위치에 머무르지 않고 말하지 않은 것들 속으로 빨려들어 갈 때 문제가 생긴다. 아담 랭의 구술을 감동적인 이야기로 재구성하는 대신, 거기서 진실을 파헤치려고 하는 순간,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거역한 것과 다름없다. 그것은 고객과의 관계에서 수동적이어야 하는 유령작가의 위치를 벗어나 능동적으로 서사를 찾아나가려는 욕망이다. 말하자면 그에게는 이루지 못한 ‘진짜’ 작가에 대한 꿈이 남아 있다. 그런 맥락에서라면 영화의 마지막도 정치스릴러의 필연적인 결말이 아닌, 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그는 자신이 밝혀낸 엄청난 진실을 그 진실을 감추고 있던 당사자에게 굳이 알리는데, 그 짧은 순간 그의 표정은 영화를 통틀어 가장 당당하고 희열에 차 있다. 이는 정의로움이나 의협심의 표출이기보다는 더 이상 ‘유령’이 아니라는 자존감의 공표로 보는 편이 적절하다. 하지만 누군가의 정치적 욕망을 보완해주던 그림자 작가의 자리를 버리고 ‘진짜’ 작가의 욕망으로 대응할 때, 그건 이미 결판 난 싸움이다. 작가의 욕망보다 탐욕스럽고 무서운 건 당연히, 정치인의 욕망이니까.
남다은 영화평론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