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하얀 리본〉
<하얀 리본>에서 우리는 굉장한 경험을 하게 된다. 흑백의 단정한 색감과 그저 선량할 것만 같은 사람들의 풍경 속에서, 언뜻 대단히 불온하고 잔인하며 어찌할 도리 없이 결국 모두를 지배하게 될 악마적인 무엇인가를 목격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에는 형체가 없다. 또렷한 계기도 없다. 징후와 파괴적인 결과만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무의식중에 모두를 지배한다.
물론 우리가 임의대로 그것에 몇 가지 이름을 붙일 수는 있다. 집단 광기, 도덕과 양심의 붕괴, 그리고 파시즘 같은 단어들 말이다. 그러나 어느 단어 하나 그것을 정확히 설명해내지는 못한다. 말과 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순간의 불온함을, <하얀 리본>은 순전한 영화적 힘으로 관객의 눈 앞에 생생하게 드러낸다. 오싹하고 황홀한 영화다.
영화는 1913년 독일의 한 작은 마을을 비추며 시작된다. 영주와 기독교 신앙을 중심으로 촘촘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이 평화로운 농촌 마을에 그다지 특이한 점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아주 조금씩 이상한 일들이 생기기 시작한다. 먼저 마을의 의사가 누군가 설치해 놓은 줄에 걸려 낙마한다. 이후 영주의 아들이 실종됐다가 구타당한 채 발견되고 방화와 각종 사고사가 간헐적으로 뒤를 잇는다. 영화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마을 교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확연한 가해자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 사라예보에서 울린 총성의 소식과 함께 1차 세계 대전의 전조가 마을을 뒤덮는다.
화자는 이야기의 시작에 앞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이 마을에서 벌어진 이상한 일들이, 어쩌면 모든 걸 설명할 수 있는 단서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트윈픽스>와 <행잉록에서의 소풍>의 경계에서 악마(파시즘)의 탄생을 추적하는 미하엘 하네케의 이 농촌 스릴러는, 독일을 두 차례 세계 대전의 중심에 있게 만들었던 시민의 멘탈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우리는 그 뿌리를 영화 속에 비치는 가부장제의 폐해, 혹은 기독교 권력의 병증에서 발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좀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 끔찍한 사건에는 주모자도 배후도 책임을 물을 단 한 명의 가해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시민사회의 양심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그 모두를 공모하게 만든 악마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하얀 리본>에는 그 순간이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나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악마의 씨>의 로즈메리가 자신의 배를 빌려 세상에 나온 적그리스도를 어미의 심정으로 감싸 안는 대목을 떠올렸다. 그렇게 악마가 태어났다.
우리는 거의 매일, 사회의 건강함을 측정하는 데 동원되는 최소한의 조건들이 파괴되고 허물어지는 상황을 무력하게 지켜보고 있다. 그 대부분이 이번 정권 들어 권력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모든 게 히틀러 때문이 아니듯 모든 게 이명박 때문은 아니다. 히틀러를 만든, 이명박 대통령을 가능케 한 시민사회의 침묵과 불감증, 무력감, 그리고 비뚤어진 욕망 아래 우리 모두는 공모자다. <하얀 리본>은 지금의 우리 모습에 전율하게 만든다.
허지웅 영화칼럼니스트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