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플라이스>
[남다은의 환등상자] 스플라이스
유전공학 실험으로 탄생된 피조물들이 영화에서만 존재하던 시대는 지났다. 현실은 영화의 상상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고, 그때 영화가 대중적 관심을 여전히 붙들기 위해 택할 수 있는 길은 간략하게 두 가지 정도 있을 것이다.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유전자들의 결합이 실현되는 저 멀리 미래로 나아가거나 창조물과 인간이 같은 하늘 아래 공생하는 새로운 현실을 구축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극적인 서사는 후자가 실패하는 과정에서 온다. 인간에게는 과학을 통해 인간과 유사한 생명체를 창조하려는 욕망과 그 생명체가 결코 인간과 같아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이 동시에 있다. 그 창조물이 인간의 세상을 탐하는 순간, 혹은 공존을 갈구하는 순간, 그들은 인간에게 두려움과 적대, 그리고 불쾌감을 불러일으킨다. 적어도 영화에서는 그래왔다.
복제물의 모습이든, 괴물-기계의 형상이든 인간과 동물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한 존재들이 주는 낯섦과 익숙함, 쾌와 불쾌, 호기심과 불안은 이런 장르를 지탱하는 양가감정이다. 무엇보다 인간의 지능으로 탄생한 이 존재들을 인간 자신의 힘으로 언제든 제거할 수 있다는 안도감도 중요하다. 물론 지금은 오히려 그것의 불가능성을 보는 긴장감이 장르적 쾌감을 안길 때가 더 많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런 장르일수록 인간의 변형을 보는 즐거움과 종교, 윤리, 도덕적 각성은 저울의 양쪽 추며 무게의 중심을 어디에 맞추는지에 따라 영화의 기질, 장르적 쾌감의 강도, 혹은 전복성이 결정된다.
<스플라이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동물의 유전자를 합성하는 작업으로 난치병 치료제를 연구하던 유전공학자 엘사와 클라이브는 비밀리에 자신들의 작업 성과에 인간의 유전자를 합성한다. 곧 새로운 생명체가 탄생하는데, 그 형상은 다리 위까지는 인간 여자이고 그 밑은 조류처럼 보인다. 엘사와 클라이브는 이 생명체에게 ‘드렌’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부모가 아이를 키우듯 돌본다. 문제는 드렌이 자라날수록 그 자신도, 그리고 엘사와 클라이브마저도 경계의 감각을 잃어간다는 점이다. 감정과 욕망, 심지어 아름다움을 지닌 드렌은 인간인가 아닌가.
이 영화가 사회화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극단의 금기들을 건드릴 때, 그것이 단지 외설적 호기심의 충족을 넘어서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그 중심에 드렌이라는 연민의 대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화가 인형과 반려동물, 아이와 연인, 인간과 실험기계의 모든 면을 갖춘 이 생명체를 인간의 시점에서 관찰할 때보다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생명체의 동경과 좌절이 섞인 눈으로 인간 세상을 바라볼 때 영화는 슬프고 매혹적이다.
결과적으로 감독 빈센초 나탈리의 자유분방한 장르적 상상력도 이런 주제 앞에서는 어찌할 수 없이 윤리적 강박에 막혀 제 색을 잃고 말지만, 그가 공들여 애정을 쏟은 것이 분명한 ‘드렌’만큼은 영화가 끝나도 버릴 수가 없다.
남다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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