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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괴물인데 매력적이네?

등록 2010-07-13 16:57수정 2010-07-13 17:53

영화 <스플라이스>
영화 <스플라이스>
예술이 된 괴물들
영화 <스플라이스>, 이보다 더 강렬한 괴물이 있었나
최근 개봉한 영화 <스플라이스>가 걸작은 아니라는 평가에 동의한다. 동시에 걸작은 아니어도 볼만한 영화임은 분명하다는 평에도 동의한다. <스플라이스>는 분명 놀라운 영화다. 영화 자체는 보기 괴롭고, 끔찍하고, 불쾌할 수 있다. 불쾌의 끝까지 밀어부치는 감독의 독한 연출은 싫어하는 사람들에겐 정말 기분나쁜 영화가 되게 만든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이 영화가 정말 힘이 세다는 것이다. 적어도 보고 난 뒤 이 영화처럼 강하게 기억에 남게 되는 영화가 얼마나 되겠느냔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이 영화를 각인시키는 힘은 영화의 진짜 주인공 `괴물'에서 나온다.

스플라이스는 내용에 대한 사전 정보만으로는 <스피시즈>를 연상케 한다. 사람 모습을 한 여자 괴물, 엄청난 힘으로 사람을 찢어죽일 수 있는 치명적인 괴물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그 바탕에 깔린 철학과 이야기는 <스피시즈>와는 전혀 다르다. 인간이 만들어낸 새로운 생명체, 그리고 그 생명체의 존재를 놓고 벌어지게 되는 비극에 대한 영화다.

영화 <스플라이스>
영화 <스플라이스>

영화는 두 과학자 커플이 새로운 약을 만들어내기 위해 인간의 유전자로 새로운 생명체를 만드는데서 출발한다. 여자 과학자는 법규를 어기고 몰래 자기 디엔에이로 새로운 종을 탄생시킨다. 인공 자궁에서 태어난 그 생명체가 처음으로 과학자와 만나는 장면이 저 위의 사진이다.


메기처럼 더듬이가 달린 털없는 맨몸의 괴물 모습은 인간과는 전혀 닮지 않았지만 분명 인간의 유전자로 만들어진 반인간이다. 괴물이 자신을 만들어낸 어머니격인 여자 과학자 주인공을 겁먹은 모습으로 거꾸로 매달려 쳐다본다.

영화 <스플라이스>
영화 <스플라이스>

저 괴물은 영화속에서 이렇게 모양이 바뀌어간다. 서서히 인간과 닮아가지만, 분명 인간과는 너무나 다르다. 아기 괴물이다.

부리가 없고 털이 없는 타조 새끼같던 이 피조물은 이제 사람과 동물의 결합체같은 특성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얼굴은 세포가 분할하기 직전처럼 반분하는 중신선으로 갈라져 있고, 손가락은 네 개, 다리는 캥거루나 타조다리처럼 크다. 그리고 자기 정체성이 드러나면서 인형을 좋아하는 여자 아이로 성장해간다. 민머리에 조류 같은 눈, 캥거루 다리를 한 이 암컷이 아기옷을 입고 인형을 들고 있는 모습은 그로테스크함 그 자체다.

영화 <스플라이스>
영화 <스플라이스>

이 암컷 괴물이 인형을 안고 있는 모습은 영화 전체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현실과 비현실을 너무나 실감나게 보여주는 동시에 저 이미지 자체의 힘이 대단했다. 괴물의 탈을 쓴 인간, 인간이 곧 괴물일 수 있다는 은유.... 기괴하지만 마음을 끄는 그런 이미지였다.

이제 여자 아이는 처녀가 됐다. 상반신은 성숙한 여성의 몸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여전히 타조 또는 캥거루 다리는 그대로다. 엄마 과학자 앞에 다소곳하게 다리를 구부리고 선 저 모습. <스플라이스>를 연출한 빈센초 나탈리는 분명 시각 이미지의 힘을 제대로 아는 감독이다. 이번 영화가 그의 출세작 <큐브>만큼 대중적 성공은 거두지 못했어도 저런 괴물의 모습을 생각해내는 것을 보면 그는 분명 재주꾼임이 틀림없다.

영화 <스플라이스>
영화 <스플라이스>

성숙한 괴물(극중 이름은 `드렌')은 본능을 따를 수밖에 없고 결국 어쩔 수 없이 결말은 파국으로 돌진한다. 영화가 담고 있는 이야기는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간단하면서도 가장 섬뜩하다. 내용은 스포일이 될까봐 여기까지. <스플라이스>란 영화에 대해 높게 평가하고 싶은 것은 잊지 못할 인상적인 괴물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영화속 괴물 드렌은 기거가 창조한 에이리언처럼 독창적이진 않아도 에이리언보다 오히려 더 공포스럽다. 괴물은 상상의 존재지만 그 상상이란 기존 우리의 지식과 인식에서 나온다. 우리가 아는 것이 조금 변형되었을 때 주는 기괴함과 공포감은 오히려 더 커진다. 어떻게 해야 가장 기분나쁘고 무서운 괴물이 나오는지 감독 빈센초 나탈리는 잘 알고 있었다.

# 괴물로 뜬 작가, 피치니니의 아트

괴물 영화 <스플라이스>의 저 기묘한 괴물을 보면서 연상된 것은 너무나 당연히 패트리샤 피치니니였다. 괴물의 이미지에 집착하는 미술가, 인간과 괴물에 대한 성찰을 강요하는 집요한 작가다. 차분하고 자상한 아줌마같은 외모와 달리 피치니니는 우리가 좀처럼 직면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렬한 작품들을 만들어왔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너무나 실감나는 그의 피조물들은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 강한 시각적 충격을 준다. 영화 <스플라이스>의 드렌은 너무나도 피치니니의 괴물들과 닮아 있었다.

패트리샤 피치니니의 괴물
패트리샤 피치니니의 괴물

피치니니는 실리콘과 털으로 생생한 괴물들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괴물들과 인간이 공존하는 상황을 연출한다. 위의 작품처럼 괴생명체와 인간이 평화롭게 같이한 작품들이 여럿이다.

소년을 껴안고 편안히 잠든 괴물. 자세히 보면 끔찍한 몰골이다. 얼굴은 이렇게 참아줄만 하지만, 등을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이다.

패트리샤 피치니니의 괴물
패트리샤 피치니니의 괴물

물론 괴물이 인간과 평화롭게 공존만 하는 것은 아니다. 충돌을 그린 작품도 있다.

보기에는 귀여울 수도 있는 괴물이 얼굴을 덮쳤다. 너무나 사실적인 표현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패트리샤 피치니니의 이 괴물 작품 이미지가 한 포털 사이트 초기화면에 올라온 적이 있는데, 인공 예술품이란 것을 몰랐던 사람들이 놀라자빠져 화제가 된 적도 있었다.

패트리샤 피치니니의 괴물
패트리샤 피치니니의 괴물

피치니니가 만들어낸 저 가공의 생명체들은 때론 끔찍하고 때론 귀엽기도 하다. 그런 묘한 느낌에 사람들은 열광한다. 아름다움과 추함, 정상과 비정상은 동시에 드러날 때 반대되는 성질들을 강조하는 법. 괴물은 끔찍하고 이상하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매혹적이기도 하다.

패트리샤 피치니니의 괴물
패트리샤 피치니니의 괴물

올 봄 한국에서 열렸던 전시회에 나왔던 <한 팔의 힘>이란 작품이다. 피치니니의 피조물 가운데 가장 인간에 가까운 괴물이 등장했다. 반면 인간과는 전혀다른 정말 이상한 괴물들도 많다.

이 마주하기 싫어보이는 괴물의 이름은 `Bottom Feeder'. 바톰 피더의 원뜻은 바닥에 떨어진 것을 먹고 사는 물고기, 그래서 `밑바닥 인생'이란 뜻도 있다. 흥미로운 것은 `바톰 피더'라는 괴물영화가 있었는데, 그 영화에서 작가가 영감을 받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저 작품 바톰 피더는 머리를 땅바닥에 대고 다니는 괴물의 모습이다. 작가가 인터뷰에서 밝힌 이 작품 제작 동기는 뜻밖에도 상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었다고 한다. 상어는 바다 바닥의 쓰레기를 먹는데, 그래서 저렇게 머리가 상어 모양인 쓰레기 먹는 괴물을 착안했다는 것이다.

패트리샤 피치니니의 괴물
패트리샤 피치니니의 괴물

패트리샤 피치니니의 작품 가운데 그나마 사람들이 귀여워할만한 것을 꼽자면 이것.

그리고 가장 싫어할 만한 것을 꼽자면 이것.

피치니니는 왜 이렇게 이상한 괴물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그건 영화 <스플라이스>의 주제와 다르지 않다. 해외토픽을 유심히 본 사람이라면 인간이 자기 욕망을 위해 얼마나 희한한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알 것이다. 쥐에 인간의 귀를 이식한 사진을 떠올려보시라. 영화 속 괴물 드렌과 피치니니의 괴물들은 결코 공상이 아니다. 오히려 더욱 극명하게 지금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이렇게 철저하게 현실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저 괴물들로 두가지 질문을 던진다. 하나는 인간의 윤리성에 대한 물음이다. 사람들이 먹기 좋게 빨리 살찌는 돼지 등을 유전자 조작으로 만들어내는데, 과연 그 결과는 생각해봤느냐는 것이다. 두번째는 저런 괴물과 인간의 관계다. 관계와 공존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기에 그의 작품들은 이상해도 결코 잊혀지지 않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 연속과 불연속, 인간은 얼마나 대단한가

<스플라이스>와 피치니니의 괴물들은 인간의 본성을 극명하게 포착한 것들이다. 인간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떤 존재가 되고자 해왔는지를 저 괴물들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은 스스로 다른 주변 요소들과 떨어져 있는, 곧 불연속 상태인 존재로 본다. 이런 인간의 습성을 브루스 매즐리시는 `4가지 불연속'이라고 정리한 바 있다.

첫번째 불연속성은 인간이 사는 지구가 우주의 일부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두번째 불연속성은 인간은 동물이 아니라는, 곧 동물과 이어지지 않는 존재란 생각이다. 세번째 불연속성은 육체와 인식은 별개라는 생각이다. 네번째 불연속성은 인간은 기계와 불연속한 존재란 의식이다.

매즐리시는 인간이 이런 네가지 불연속성을 하나 하나 깨뜨리며 나아가고 있다고 봤다. 지구는 우주와는 별개라는 생각은 코페르니쿠스의 천동설로 깨졌고, 인간은 우주와 연속성을 지니게 되었다. 인간이 동물과 이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은 다윈에 의해 깨졌다. 진화론이란 새로운 사고가 등장하면서 인간도 결국 동물의 일종이란, 곧 동물과 인간의 연속성이 드러났다.

육체와 의식의 불연속성은 프로이트가 깼다. 프로이트는 의식적 자아가 육체의 주인이 아니며, 인간은 무의식과 연속된 존재라고 설파했다. 마지막 기계와 인간의 불연속성도 21세기 들어 깨지고 있다. 인간과 기계의 구분은 결코 깨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지만 사이보그란 개념이 등장하면서 현실이 되었다. 기계장치가 인간의 몸에 들어간 것이 사이보그인데, 이미 우리는 수많은 사이보그들과 살고 있다. 무슨 소리냐고? 심장병 환자들의 몸속에는 심장박동장치가 들어갔고, 장애인들은 각종 보철 기계들의 도움을 받으며 생활한다. 인조팔과 무쇠다리는 이미 존재한다.

인간이 여러 불연속성을 깨온 것은 분명 진보의 측면이 크다. 그러나 어두운 미래에 대한 무모한 실험도 존재한다. 자연의 종과 발생, 진화를 거스르는 조작은 저런 암울한 미래를 현실화하고 있기도 하다. 영화와 미술에서 보여주고 있는 저 괴물들은 기괴하면서도 아름다운 그런 시각적 즐거움 또는 충격을 주지만 그 이전에 이런 현실에 대한 심오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과학과 윤리의 관점으로 이야기하면 와닿지도 않고 애매모호할 이야기들이 예술가들이 상상해낸 괴물로 인해 말이 필요없이 어두운 미래를 느끼게 해준다. 예술은 그래서 위대하고 시대를 앞서 예언한다.

마지막 뱀다리. 같은 예술가지만 결국 한 수 위는 피치니니라고 생각한다. 빈센초 나탈리의 드렌은 충분히 인상적이었지만 피치니니의 괴물들처럼 사람을 묘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그 이유는 피치니니의 괴물들의 눈에 있다. 피치니니의 괴물들은 기괴한 모습으로 먼저 놀래키고 무언의 감정을 가득 담은 눈망울로 우리를 감동하게 만든다. 윗 사진의 괴물의 눈에는 분명 모성애가 가득하다. 눈을 저렇게 표현한 점 하나만으로도 피치니는 분명 대단한 예술가다.

by 구본준 http://blog.hani.co.kr/bonb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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