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유키와 니나’
[남다은의 환등상자] 유키와 니나
더는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 이혼을 결심하는 부모, 자식을 위해 불행한 결혼을 견디는 부모. 이기적인 부모와 희생적인 부모. 아이는 훗날 어떤 부모를 고맙게 추억할까. 그러나 어찌되었든 지금 당장, 정답지 않은 부모와 사는 아이에게는 원망할 권리가 있다. 왜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까. 그들이 나를 세상에 내보낸 것도, 그들이 헤어지는 것도, 혹은 그들이 참고 사는 것도 결국은 그들의 선택이다. 그러니 아이로 산다는 건 내 의지와 상관없는 타인의 선택을 감당하고 그 안에서 살아남는 법을 골몰하는 것이다. 타인의 선택과 공존하기 위해 눈치 보는 아이는 실은 어른보다 너그럽다. 나이가 들며 ‘나의 선택’이 자라나는 걸 우리는 자율과 독립이라고 말하지만, 어쩌면 그건 자기 안으로 좁아지는 길인지 모른다.
“마음은 아프지만 이대로 살면 마음이 더 아플 것 같아.” 유키의 일본인 엄마는 프랑스인 아빠와의 이별의 필연성을 딸에게 이렇게 호소한다. 애써 태연한 척 엄마의 흐느낌을 듣는 유키. 소녀는 세상에서 가장 돌이키기 어려운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걸까. 사랑의 요정이 보낸 다정한 편지와 엄마를 위해 손수 만든 요리와 슬픔이 잔뜩 깃든 어린 딸의 표정 앞에서도 부모는 선택을 철회할 생각이 없다.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너 자신이야”라고 말하는 아빠의 민주적인 위로는 어딘지 가혹하다. 2주 후에 데리러 오겠다며 일본으로 떠나는 엄마의 뒷모습은 망설임보다는 결단을 품고 있다. 하지만 소녀는 떼쓰지 않는다. 대신, 이혼한 부모를 둔 단짝 친구 니나가 가출을 제안하자 망설임 없이 집을 떠나 여행길에 오른다. 도시의 일상적인 풍경을 세심하게 관찰하던 영화가 전혀 다른 기운을 품게 되는 건 여기부터다. 소녀들은 울창하고 고요한 숲에 이른다. 유키는 무언가에 홀리듯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중얼거리며 나무들을 헤치며 걷고 또 걷는다. 영화가 숲과 소녀를 오래 지켜본 후, 숲 밖으로 나오자 믿을 수 없는 풍경이 펼쳐진다. 유키는 지금 엄마의 고향인 일본의 어느 고요한 마을에 서 있다. 지나가던 일본인 소녀들이 유키를 알아보고 인사한다.
이 아름다운 판타지는 아이의 천진한 상상이라고 하기에는 이상하게도 눈물을 머금고 있는 것 같다. 유키는 이미 자신의 힘으로 부모의 관계를 회복시킬 수 없고, 결국 아빠와 친구를 남겨두고 일본으로 떠나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때 이 숲의 판타지는 소녀가 상상의 세계 속에서 현실의 슬픔과 원망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아닐까. 아이가 소망을 체념하는 가장 성숙한 방식이 아닐까. 소녀는 환상 속에서 홀로 외로이, 그렇게 한 다음 현실의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래서 이 숲의 판타지를 동심의 구현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어른들의 환상과 달리, 아이들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지 않는다. 영화는 아이들이 그 좌절감을 끌어안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우리에게 고요히 일러준다.
남다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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