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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허지웅의 극장뎐] ‘난도질’은 있지만 ‘서사’가 없다

등록 2010-08-15 22:31

 <악마를 보았다>
<악마를 보았다>
김지운은 점점 더 일상적인 풍경으로부터 이탈하고 있다. 자주 함께 거론되는 동세대 다른 감독들은 일상적인 인물들의 일상적이지 않은 이야기를 선호한다. 그는 대신 일상적이지 않은 인물들이 일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건을 겪는 쪽을 선택한다. 이런 취향은 <반칙왕> 이후 거의 예외 없이 되풀이됐다. 그래서 우리는 <악마를 보았다>의 전반부에 등장하는 사람의 귀를 보고 <블루벨벳>만큼 전율할 수 없다. 국정원 직원과 그의 임신한 애인과 연쇄살인범, 그리고 한차례의 죽음이 지나간 저 세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놀라울 게 없는 것이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할 게 없는 세계의 이상한 이야기는 관객에게 큰 감흥을 주지 못한다. 보기 전에는 누구나 보고 싶지만, 보고 나면 달리 큰 감정이 생기지 않는 최근 김지운 영화의 알 수 없는 심심함이 거기서 유래한다. 덕분에 김지운 영화는 종종 서사 대신 개별 장면들의 인상으로 기억된다. <악마를 보았다> 또한 그렇게 될 공산이 크다. 우리는 “짐승을 잡자고 짐승이 될 수는 없다”는 빤한 이야기의 동력 대신, 뿜어져 나오는 피와 강간과 산산이 분해된 살 조각들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악마를 보았다>의 폭력은 가끔 전위적으로 보일 정도로 상당한 수준이다. 여기서 기니피그 시리즈나 허셸 고든 루이스의 영화들을 거론하며 별게 아니라고 말하는 건 의미가 없다. 주류영화 시스템에서 만들어졌으며 실제 배급되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문제냐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이 도전적인 표현 수위에 아무런 불만이 없다.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보이는 것을 선호하는 취향에 있어서 영화는 언제나 만만한 상대다. 그러나 무엇을 모방할 것인지 고려하고 있는 자들에게 소스 자체는 이미 문제가 아니다. 더군다나 영화 속 악당의 폭력은 세상 밖에서 제도적으로 옹호되는 폭력과는 달리 쉽게 전염되지 않는다. 영화가 방아쇠 역할을 할 수 있다면 9시 뉴스는 법으로 금지되어야 마땅하다. 사적인 불편함을 윤리와 존엄의 문제로 포장해 세상에 강제하는 버릇은 버려야 한다. 오히려 이 영화의 폭력 묘사는 최민식의 선언과도 같은 연기와 함께 상징적으로 기억될 필요가 있다.

<악마를 보았다>에 대한 문제는 표현이 아니라 깊이에서 제기되는 게 자연스럽다. 이 영화 속의 난도질이 충분한 고민의 두께 위에 펼쳐졌다면 훨씬 보기 좋았을 것이며, 관객은 수위 대신 이야기를 기억할 수 있었을 것이다.

허지웅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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