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탈주’
[남다은의 환등상자] 영화 ‘탈주’
군복을 입은 아직은 소년 같은 세 남자가 숲 속을 달린다. 한 무리의 군인들이 그들을 뒤쫓는다. 밝은 대낮에 시작된 추격전이 밤까지 이어진다. 어둠 속에 세 남자가 두려움에 떨며 모여 있다. 한 남자가 말한다. “절대 안 돌아갑니다.” 각자 절박한 사정을 품고 나왔으나 이제 그 어디로도 돌아갈 수 없는 자들, 군대로도, 집으로도, 과거로도, 미래로도 돌아갈 수 없는 자들. 이것은 탈영병들의 이야기다. 이제 그들에게 남겨진 선택은 단 두가지다. 땅끝까지 쫓겨 가거나,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것. 그들 중 가장 여린 남자는 어두운 숲 속에서 홀로 죽음을 택한다. 그에게는 군대도, 집도, 이 나라도 나쁜 아버지들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결국은 똑같이 불행한 곳이다. 그가 스스로에게 겨눈 총소리를 뒤로하고 살아남은 두 남자는 죽음보다 피로한 탈주를 시작한다.
이송희일의 <탈주>는 제목 그대로 탈영병들의 며칠간의 탈주, 오로지 그 길만을 따라가는 영화다. 우리가 거리를 두고 그들의 긴박한 행로를 ‘구경’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영화가 육체적으로 소진되고, 피를 흘리고, 슬픔과 분노를 어찌하지 못할 때, 보는 이의 몸과 마음도 천천히 쓰러져가는 것 같다. 그건 두 남자의 입장에 쉽게 동일시되어서가 아니라, 그 고된 길 끝에 빛이 아닌 비극이 예정되어 있다는, 이 사회에 대한 비관이 이미 강렬하게 우리를 덮치고 있기 때문이다. <탈주>는 시작부터 벼랑 끝에 서 있기를 작정했으며, 벼랑 끝 경계 위에서 인물들과 함께 버틸 수 있을 때까지 견디려고 한다. 오로지 인물들의 불안과 고통에만 모든 것을 쏟아붓고 자신 역시 그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가는 이 영화는 그런 방식으로 지금 이 사회를 비춘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주인공들을 ‘다루는’ 대신, 그들과 같은 운명을 걷기로 결심한다. 그 결심만이 자신의 인물들이 내린 선택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믿는 것 같다.
감독은 인물들에게, 그리고 이들의 행로에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공간을 마련해주지 않지만, 광활한 자연의 품만은 열어 두었다. 도심에서의 추격전이 아니라, 나무가 우거지고 푸른 하늘이 펼쳐진 길 위에서의 추격전이라는 점이 때로는 가혹하게 느껴져도, 때로는 유일한 위로가 된다. 끝을 앞둔 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순간들, 이를테면 바람에 물결처럼 흔들리는 나무들 소리,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꿈꾸는 찰나의 희망, 적막한 도로의 희미한 트럭 불빛 속에서 추는 슬픔의 춤, 그런 순간들에 이 잔인한 영화의 속마음이 있다. 만약 이 영화가 점차 자기파괴적으로 변해가는 소년들의 괴물성에만 초점을 맞추었다면 <탈주>는 사회를 밑거름으로 장르를 소비하는 영화에 그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지 군대제도에 대해 발언하는 정치적인 이슈 때문만이 아니라, 이 영화의 바탕을 이루는 심성 때문에 <탈주>는 더 주목받아야 마땅하다. 이 사회가 망치고 있는 소년들의 고운 심성이 여기 눈물처럼 맺혀 있다.
남다은 영화평론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