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영화>
[남다은의 환등상자] <계몽영화>
박동훈의 단편 <전쟁영화>는 전쟁의 스펙터클이 단 한 차례도 삽입되지 않는 이상한 전쟁영화다. 영화의 절반 이상이 한국 전쟁 이후, 어느 다방에 마주앉은 남녀의 대화 장면으로 채워진다. 그들은 전쟁에 대한 각자의 기억을 약간의 허세를 담아 서로에게 전달하고 있다. 그러다가 둘은 다방 밖의 벤치에 앉아 데이트를 즐기는데, 문득 그들 위로 비행기가 지나간다. 그 소리가 마치 전투기의 굉음같이 느껴지는 순간, 그토록 여유를 부리던 남자는 갑자기 벤치 옆 마루 밑으로 기어들어간다. 남자의 두려운 시선과 웅크린 몸, 그걸 벤치에 앉아 바라보는 여자의 낯선 표정, 그리고 금방이라도 폭격을 시작할 것만 같은 하늘. 단조롭고 달콤한 연애담을 싸늘하고 신경증적인 전쟁의 징후가 뒤덮는 순간이다. 감독은 전투장면 대신, 전쟁을 겪은 자들의 트라우마를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우리 눈앞에 전쟁을 형상화했다. 피 흘리는 육체의 현시보다 더 끔찍한 외상적 기억의 출몰. 그때 우리는 물을 수밖에 없다. 이 남자에게는 어떤 과거가 있었을까? 그는 과연 어떤 미래를 살아갈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답이,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답에 대한 감독의 질문이 바로 <계몽영화>를 지탱한다. 이를테면 두 개의 문제의식이 있다. <전쟁영화>의 주인공인 정학송을 이렇게 살게 한 한국 사회는 무엇인가?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질문. 그렇다면 정학송은 역사의 행위자로서 어떤 선택을 했고, 어떤 선택을 거부했으며, 무엇을 영위하거나 방관했는가? 역사적 주체의 결단에 대한 질문. <계몽영화>는 이를 위해 정학송의 삶을 개인적 차원에 한정하지 않고 그의 아버지 정길만과 그의 자녀들의 시대 안에 위치시킨다. 삼대의 삶, 그러니까 1930년대, 1960년대, 1980년대, 그리고 현재를 야심 차게 오가는 과정에서 일제 치하와 한국전쟁, 유신정권과 신자유주의 시대를 거치며 일그러진 한국인의 자화상이 드러난다. <계몽영화>는 어떤 사건 혹은 현상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역사적 맥락이며, 그 맥락은 역사의 반복과 맞닿아 있고, 그걸 야기하는 인간의 태도를 보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영화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정작 주목하게 되는 인물은 정학송이 아니라 그의 딸이다. 영화는 그녀에게 아버지에서 아들로 반복되는 폭력과 착취의 역사를 지켜볼 수 있는 자리를 주었다. 하지만 시대에 무기력하고 가정에 폭압적인 가장이었던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는 이 딸 역시 아버지와 별반 다르지 않은 ‘주류’의 삶을 꿈꾸고 있다. 다시 말해 영화는 그녀를 아버지의 역사 밖에 선 순수한 관찰자가 아니라, 동시에 그 안에 공모한 자로 위치 짓는다. 아버지의 역사를 피해자의 입장에서 응시할 때, 그 안에서 키워져 모순으로 점철된 자신의 욕망 또한 마주해야 하는 자의 고통이 여기 있다. 어찌해야 이 궁지를 윤리적으로 풀어낼 수 있을까. <계몽영화>가 우리에게 던지고자 하는 궁극적인 질문이다. 남다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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