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영화·애니

[허지웅의 극장뎐] 젊은 영화인의 냉소와 김지미의 미소

등록 2010-10-18 10:06

젊은 영화인의 냉소와 김지미의 미소
젊은 영화인의 냉소와 김지미의 미소
김지미가 15회 부산국제영화제 회고전에 참석했다. ‘그녀가 허락한 모든 것: 배우 그리고 김지미’라는 제목의 영화제 공식 행사였다. 그녀가 명품 브랜드로부터 증정받은 디렉터스 체어에 왕비처럼 올라앉아 환하게 웃었다. 김지미의 미소. 이는 올해 부산영화제가 소망했던 오랜 응어리의 살풀이였다. 이 장면은 10년이 넘은 영화계 갈등에 종지부를 찍는, 혹은 적어도 화해의 기회가 남아 있음을 알리는 상징이 될 수 있었다. 그것이 이 회고전이 갖는 매우 소박한 정치적 목적이었다. 그러나 일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김동호 위원장은 “신구세대 영화인이 대립과 보혁 갈등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이에 대한 화합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김지미 회고전을 준비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1998년, 김지미 이사장이 이끄는 영화인협회는 문성근, 명계남 등 젊은 영화인들의 구성체인 충무로포럼과 대립했다. 충무로포럼은 영화인회의로 이어졌고, 영화인협회와 영화인회의의 충돌에서 영화인회의가 우세하게 되면서 협회는 영향력을 거의 잃게 된다.

본격적인 갈등은 영화진흥위원회 인선과 관련해 터져나왔다. 영진위는 영화진흥법 개정에 따라 기존의 영화진흥공사를 폐지하고 1999년 5월 출범했다. 집행부는 10명의 진흥위원이 결정했다. 초대 위원장에 신세길, 부위원장에 문성근이 선임됐다. 10명의 진흥위원 가운데 정지영, 문성근 위원은 영진법 개정을 주장했고, 조희문, 김지미, 윤일봉(전 영화진흥공사 사장) 위원은 반대해왔다. 싸움은 예정된 것이었다.

결국 김지미, 윤일봉 위원이 “우리는 문화부의 진흥위원 위촉을 수락한 적이 없으니 현 집행부는 불법”이라며 문제를 제기한다. 이 사건은 ‘영진위 사태’라는 이름으로 꽤 오랫동안 신문 사회면을 표류하게 된다. 결국 신세길, 문성근이 사퇴하고 박종국, 조희문 집행부가 새로 조직되지만 상황은 진정되지 않았다. 갈등 끝에 새로 선임된 유길촌(유인촌 현 문화부 장관의 형) 위원장은 “전 위원회가 뽑은 조희문 부위원장을 인정할 수 없다”며 불신임을 의결한다. 이 모든 진흙탕을 뒤로하고 2000년 6월, 김지미는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떠났다.

다시 15회 부산영화제로 돌아와보자. 한때 영진위에서 쫓겨나왔던 조희문은 영진위원장이 되었다. 김지미는 회고전 참석을 위해 그날 이후 처음으로 한국땅을 밟았다.

애초 영진위 무용론을 주장했던 조희문 위원장이 이를 실증이라도 하려는 듯 거의 소설 같은 수준의 무능력을 보여주며 영화계 분열을 부채질하고 있는 가운데, 신구 갈등의 중심이고 산증인이었던 그녀가 부산영화제에 참석해 화합을 논한다는 것. 그야말로 우리가 원로에게 바라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김지미가 한국에 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조선일보> <문화일보> 등 보수 매체와의 인터뷰였다. 여기서 그녀는 작정한 듯 “선배가 잘못했다고 너희 다 물러가라 이런 식이면 공산당과 뭐가 다른가” “우리보고 인사도 안 하는 애들이었다” “영진위 사건은 영원히 못 잊는다. 용서가 안 된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이 재미없는 무협의 세계에서 장무기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은 언제나 멸절사태에 불과했음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고 말았다. 나이가 많다고 원로가 되는 게 아니다. 원로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원로를 자처하며 합리에 저항할 때 세상의 체계는 초라해진다. 회고전은 의미없이 화려했고 젊은 영화인들은 냉소를 보냈다. 15년 동안 영화제를 유례없이 모범적으로 운영해온 김동호 위원장의 마지막 한 방은, 그렇게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허지웅 영화칼럼니스트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