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노; 연애조작단
남다은의 환등상자 / <시라노; 연애조작단>
누군가를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이 한편에 있고 실패든 성공이든 그 마음의 결과가 다른 한편에 있다고 해보자. 이 두 항은 사랑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다. 그때 둘을 잇는 안정되고 명징한 길을 찾지 못해 헤매면서도 그 길을 포기할 수 없는 우리는 어리석고 슬픈 존재들이다. 사랑에 빠진 자들은 갈망한다. 최대한 자존심을 지키며 최소한의 고통으로 마침내 성공에 도달하는 길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사랑이라는 게임, 혹은 확률 싸움. 이 시대 숱한 연애 상담가들, 그리고 영화 속 ‘시라노 에이전시’는 그저 곱게만 사랑하고 싶어 하는 자들의 이기적인 욕망의 산물이다.
한때 연극을 업으로 삼았던 병훈(엄태웅)과 동료들은 돈을 벌기 위해 ‘시라노 에이전시’를 운영하고 있다. 마치 한 편의 연극을 올리듯 의뢰인들의 짝사랑이 연애가 될 때까지 우연을 가장한 상황들을 연출해주는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사랑은 어차피 작위적이며, 결국 자본의 교환일 뿐이라고 냉소하는 것도 같다. 사랑을 철저히 도구화해서 사랑의 신비를 창조하는 아이러니가 이 에이전시를 지탱한다. 만약 멤버들에게 유일한 직업윤리가 있다면, 의뢰인의 판타지를 구현하되, 자신들은 결코 그 판타지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판타지를 만든 자가 거리를 두고 그 판타지를 바라볼 때, 그 간극은 종종 우리에게 사랑에 대한 쓸쓸한 고민들을 던진다. 어쩌면 좋은 로맨틱 코미디는 우리의 편견과 달리 이성을 뒤흔드는 감정이 아니라 감정을 바라보는 이성이 더 중요한 장르일지 모른다.
하지만 의뢰인 상용(최다니엘)의 짝사랑인 희중(이민정)이 병훈의 옛 연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영화는 사랑을 다루는 대신, 어리광을 부리며 스스로 사랑에 빠진 것처럼 군다. 병훈이 상투적인 감정의 구조를 연출하는 대신, 그 상투성 속에 허우적거리면서 영화는 삼각관계의 진부한 구도를 답습한다. 이 삼각형의 각 꼭짓점에 위치한 자들은 동등한 상황에 처해 있지 않다. 병훈은 게임 판을 읽고 조종하는 자이고, 상용은 그 게임 판을 통째로 사들인 자다. 그들의 게임에 무지한 희중은 가장 수동적인 것 같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판이 아닌 사람을 보는 자다. 그녀에게만 이 관습적인 게임 판을 뒤엎을 의외성이 있다. 하지만 사랑의 역동성이 아니라 사랑(게임)의 완성에만 몰두하는 영화는 희중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생각이 없다.
<시라노; 연애조작단>은 사랑을 갖고 싶어 하면서도 사랑 때문에 부서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안전한 놀이터다. 그리고 이 놀이터가 어느 순간 지루해지는 이유는 그것이 단지 판타지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 판타지가 이미 거기 정해진 규칙대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놀이터에는 현실적 조건과 부딪쳐서 판타지를 만들어내고 어떻게 해서든 그걸 지키려고 시도하거나 그 판타지가 무너지는 광경을 용감히 대면하는 연인들이 없다.
남다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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