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이 크롤러
스카이 크롤러
우리는 마침내 전쟁이 사라진 시대를 꿈꿀 수 있을까.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되지 않고 그 누구의 희생도 담보하지 않고 어느 순간 깨달음처럼 평화가 도래할 순간을 꿈꿀 수 있을까. <스카이 크롤러>를 보면서 그 순진한 기대를 접는다. 인류의 평화란 다른 어딘가에서 죽음과 고통이 진행중이라는 사실의 반증에 불과하다. 인간은 비참함에 동참하지 않으면서 그걸 목격할 때만 자신의 평화를 인지하는 동물이다. 전쟁은 끝난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 좀더 영악하고 간교한 형식으로 발전중이다. 애국심 따위의 가치가 사라져도 전쟁은 살아남는다. 오로지 온전히 자본에 복무하는 전쟁의 본질에 목표의 완결이란 없다. 아마도 이것은 오시이 마모루가 바라보는 현재, 혹은 예견하는 미래일 것이다. <스카이 크롤러>는 전쟁이 전투 기업들에 의해 쇼 비즈니스로 소비되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이 전쟁 게임에도 여전히 생존과 죽음이 있다. 무엇보다 전쟁을 지켜보며 흥분하고 안도하는 시청자가 있다. 그렇다면 이 잔혹한 게임을 떠맡아 버려질 자는 누가 될 것인가.
<스카이 크롤러>에서 그 역할은 킬드레, 즉 어른이 될 수 없는 아이들의 운명이다. 그들은 육체적으로, 연령의 기준으로 아이라기보다는(영화에서 이들의 외모는 어른들의 그것과 그다지 차이가 없다) 기억할 수 있는 과거, 기대할 미래가 없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들에게는 오직 ‘오늘’만 있다. 아니, ‘오늘’이란 어제와 내일이 있을 때 존재하는 것이라면, ‘오늘’도 없다. 그저 육체의 현존 이외의 다른 표현을 찾을 수 없는, 무한히 반복되는 시간을 멈추기 위해서는 전투에서 죽음을 맞는 방법밖에 없다. 이들이 싸워야 할 적은 티처라고 불리는 어른으로, 단 한 번도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그는 킬드레가 죽일 수 없는 자다. 보이지 않지만 그 무엇보다 강력한, 세상을 이렇게 망쳐놓은 기성세대라는 적, 그리고 태어나는 순간 이전 세대의 전쟁병기가 된 무력하고 순응적인 젊은 세대. 그 때 희망 없는 세상을 사는 젊은이들에게 다정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오시이 마모루는 말한 적 있다.
하지만 그 말을 믿을 수 없다. <스카이 크롤러>는 가혹한 영화다. 이 영화에서 누가 이 아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게 다뤄진다. 오직 이 아이들에게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만을 질문한다. 기성세대에 책임을 묻는 영화가 아니라, 아이들에게 결단의 태도를 묻는 영화다. ‘너는 살아라. 무엇인가 변할 때까지.’ 분명한 건 오시이 마모루는 젊은 세대에게 연민을 쏟고 있는 게 아니라, 그걸 넘어서 눈물을 참으며 냉정하게 부탁하고 있다. 세상이 쉽게 변할 수 있다고 다독이는 대신, 그래도 이 세상을 버텨내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이 영화가 희망적이라는 평에는 동의할 수 없으나, 한 가지 확신만은 할 수 있다. 오시이 마모루는 세상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아파하는 좋은 어른이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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