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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치매가 만들어낸 황혼의 로맨스

등록 2010-12-13 08:11

영화  <러블리, 스틸>
영화 <러블리, 스틸>
스물셋 신예 패클러 감독이 노인의 시각으로 그린 수작
스물세살 감독의 작품이란다.

<러블리, 스틸>. ‘아직도 사랑스런’이란 뜻의 이 영화는 고졸 학력의 감독 니컬러스 패클러가 달랑 시나리오만 들고 가 할리우드 제작자를 설득해 만들어냈다. 그것도 마틴 랜도, 엘런 버스틴 등 내로라하는 배우를 캐스팅했다. 이 영화의 유일한 단점은 스포일러를 포함하지 않고는 기사를 쓸 수 없다는 것.

슈퍼에서 일하며 혼자 사는 노인 로버트. 어느 날 그의 집 앞에 한 가족이 새로 이사를 온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선 그는 화장실에서 나오는 낯선 노파를 발견한다. “남의 집에서 무슨 일이오? 당장 나가시오.” “문이 열려 있어서 걱정돼서 들어와 보았어요.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며 허둥지둥 나간다. 노파는 잠시 뒤 정식 노크하고 느닷없이 데이트를 신청한다. 슈퍼에서 일하는 당신을 보고 반했다며 며칠 뒤 저녁을 함께 먹자는 것.

생애 처음(?)으로 구애를 받은 로버트는 어쩔 줄 모르기도 하고 설레기 이를 데 없어 슈퍼의 젊은 사장한테 도움을 청한다. 입고 갈 옷을 고르고 프랑스식 식당에 예약을 한다. 그러는 며칠 동안 옷 벗고 자고 일어나 이를 닦고 옷을 입고 출근을 해 일을 하고 젊은 사장과 농담 따먹기를 하고 대걸레질을 하고 연필그림을 끼적거린다. 마침내 약속한 날. 한껏 멋을 낸 이들은 거룩한 음식을 들면서 한껏 우아하게 데이트를 한다. 이들의 로맨스는 계속돼 크리스마스까지 이어진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첫날부터 제집인 듯 로버트의 집에 들어와 화장실을 기웃거리고, 당돌하게 데이트를 신청하는 메리나 슈퍼 사장이 하릴없는 노인네를 고용해 농담 따먹기를 하는 거나, 엄마의 철없는 연애를 원한다면 반대하지 않는다는 메리의 딸이나. 또 장면이 바뀔 때마다 담배 연기가 그득한 주황색 장면이 반복 삽입되는 것도 그렇다.

로버트는 슈퍼 점주. 아들딸도 어엿하게 성장했다. 하지만 지금은 치매. 아내는 이웃집 노인, 아들은 슈퍼 사장님, 딸은 이웃집 딸이다. 그에게 일상은 짧은 수면과 짧은 각성의 반복. 하루에도 몇 번씩 일어나 이를 닦는다. 하루 24시간은 그에게 일주일에서 보름쯤 된다. 놓아버린 정신줄은 온통 안갯속이다. 치매 당사자나 수발하는 가족이나 모두 눈물겹다.

치매 노인의 시각으로 영화를 만드니 히치콕 영화가 따로 없다. 젊은 감독의 신선하고 깜찍한 발상이 정말 놀랍다. 23일 개봉.

임종업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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