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영화·애니

글자들이 배우의 육신을 통과하면…

등록 2010-12-20 08:52

카페 느와르
카페 느와르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만든 영화 ‘카페 느와르’
2년 묵힌 사랑이야기 세밑 개봉…다른 영화 장면 다양하게 인용
“낯선 문어체 대사·흑백전환 화면…교양문학전집 연작 만들고싶어”

남이 만든 영화에 도마질만 하던 평론가가 정작 스스로 만들면 어떨까? 지난 4월 평론가 김소영씨가 첫 장편극화 <경>을 선보인 데 이어 이번에는 정성일씨가 작품을 내놨다. <카페 느와르>. 2008년 5월 촬영을 끝내놓고 2년을 묵혔다가 세밑 30일에 비로소 개봉한다. 오랫동안 영화판을 지켜본 사나이 손금처럼 겹이 두껍고 결이 복잡한 게 책으로 치면 두툼한 에세이다.

영화는 도입부를 빼면 두 가지다.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원작으로 한 1화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백야>가 원작인 2화. 1화에서 초등학교 음악선생인 ‘영수’(신하균)는 지난겨울 해변에서 모녀를 만난다. 새학기 담임을 맡은 반에 그 아이가 있었고 교사와 아이의 엄마 ‘미연’(문정희)은 사랑을 한다. 하지만 남편이 오랜 외국출장에서 돌아온다. “이렇게 계속될 수는 없어요.” “그는 남고 저는 떠나야 합니까?” “친구로 남기로 해요.” 영수는 아이의 생일에 청계천에서 산 망치를 들고 찾아간다. 2화에서 영수는 몽상가가 된다. 세상을 부술 수 없을 때 한 가지 해결책은 스스로 사라지는 것. 한강에 뛰어들었다 죽지 못한 영수는 청계천을 걷는다. 거기서 치한한테 쫓기던 소녀 ‘선화’(정유미)를 만난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요. 우정이라면 좋아요. 그는 일년 전에 떠났다가 돌아왔어요. 그런데 왜 나를 찾아오지 않을까요?” 영수는 소녀의 마음을 담아 그 남자한테 편지를 쓴다. 그렇게라도 사랑하는 이 곁에 있을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할까.

카페 느와르
카페 느와르

정 감독은 ‘세계소년소녀 교양문학전집’이라는 이름으로 연작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카페 느와르>는 첫 결과물인 셈.

낯설기로는 등장인물들의 대화와 독백이 첫째. 세계문학전집에서 금세 옮아온 듯한 생경한 문어체다. 괴테, 도스토옙스키 외에도 브레히트, 체호프, 라캉을 인용한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저는 일년 후에 다시 당신께 돌아올 것입니다. 제 말을 잘 들으세요. 우리는 일년 후에 서로의 사랑을 증명해야 합니다. 만일 제가 결혼한다면, 그건 당신밖에 없습니다. 더도 덜도 아닙니다. 그때도 당신이 여전히 저를 사랑한다면 저는 당신에게 고백할 것입니다. … 그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다음날 떠나갔어요.” 선화의 구구절절 독백은 무려 3300여자에 이른다. 정 감독은 “책의 글자들이 연기자들의 육신을 통과하고 나면 어떤 느낌을 얻게 되는지 알아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책의 리얼리즘이라고 일렀다.

영화광 아니랄까, <카페 느와르>는 어디서 본 듯한 장면들투성이다. 하나인듯, 둘인듯 ‘짜깁기 구도’는 홍상수 감독의 <극장전>에서 빌렸다. 남산타워가 반복해서 보이는 것도 똑같다. 홍 감독에 대한 경의로 읽힌다. 한강에서는 <괴물>, 청계천 공구상에서는 <올드보이>, 놀이공원에서는 <살인의 추억>이 겹친다. 허우샤오셴의 <빨간 풍선>의 풍선 소품, 고다르의 <주말>의 트레킹 시퀀스, <따로 또 같이>의 카페 장면 등이 어른거린다. 정 감독은 “모두 호감으로 인용하지 않았다. 어떤 건 호감, 어떤 건 경멸 또는 적대적, 어떤 건 긴장관계”라고 설명했다.

평론가에서 영화감독으로 변신한 정성일 감독.
평론가에서 영화감독으로 변신한 정성일 감독.

청계천 자리매김도 중요 포인트다. 도입부, 컬러로 훑어가는 지상의 건물과 간판에는 시간의 층위가 고스란히 보인다. 하지만 ‘2화’에 이르면 흑백으로 전환되면서 청계천은 시간이 거세된 <백야>의 세계로 변한다. 러시아 소녀처럼 망토로 어깨를 싸안은 채 호롱불을 든 선화의 얼굴에 가로등 불빛이 비현실처럼 춤춘다. 시멘트 벽은 색깔을 잃고 질감으로 존재하고 이방원이 계모 무덤에서 옮겨왔다는 광통교는 시간을 초월한다. 하류 청계문화회관 앞 샘플로 지은 옛 여관 속으로 등장인물이 들어가면 허구와 실제, 현재와 과거가 뒤섞인다.

무심한 듯 세밑 두 장면의 발언이 세다. 미연의 딸이 공연하는 성탄극. 청계천 벤치의 동방박사, 아기의 탄생… 그리고 처형. 십자가에 달린 채 막이 내린다. 희망이든 절망이든 해석은 관객의 몫이라며. 다음으로 청계천에서 멀지 않은 보신각 제야의 종 타종식. 텔레비전 화면은 평온하기 그지없는데 주변은 온통 빨강 손팻말에 연신 구호다. 정 감독 왈 “나는 오래 살아남았다. 올 마지막 날에도 종각에 나가 지켜볼 것이다. 아쉬운 것은 내년엔 선거가 없다는 거다.”

사랑타령 같은데 뜯어보면 정치적이다. 상영시간은 무려 3시간18분. 화장실을 미리 다녀오는 건 필수. 점심 뒤 영화를 보고 나면 어둑어둑 저녁이다. 남자주인공 신하균은 별점을 준다면 왕별이라고 했다.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