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영화·애니

[허지웅의 극장뎐] 육중한 확신의 영화, 황해

등록 2010-12-27 09:00수정 2010-12-27 11:00

영화 ‘황해’
영화 ‘황해’
올해 가장 유별난 존재감 가진 문제적 걸작은?
나홍진의 신작 <황해>는 바다 같은 야심과 그 야심에 어울리는 자신감으로 가득 찬, 크고 넓은 보폭의 짐승 같은 영화다. 여기에서 (전작에 이은) 현장에서의 잡음에 관련한 소문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겠다. 감독 개인의 인성에 대해 평가하는 지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건 나의 몫도, 관객의 몫도 아니다.

구남(하정우)은 연변에서 택시 운전을 하는 조선족이다. 6개월 전 돈을 벌러 한국에 간 아내는 소식이 끊겼다. 구남은 매일같이 다른 남자와 엉켜 있는 아내에 대한 꿈을 꾼다. 마작판에서 살기가 가득한 구남을 눈여겨본 면가(김윤석)는 그에게 한국에 가 누군가를 살해할 것을 청부한다. 천신만고 끝에 한국에 닿은 구남은 살인을 준비하는 한편 아내의 자취를 쫓는다. 문제의 디데이. 대상을 눈앞에 두고 구남이 적당한 타이밍을 기다리는 동안, 어디선가 다른 자들이 들이닥쳐 먼저 살인을 저지른다. 현장에 있다가 꼼짝없이 범인으로 몰린 구남은 필사적으로 도피한다.

우선 앞서 언급한, 짐승 같다는 수사를 영화 자체의 표현 수위가 과장되었다는 것으로 오해하지 않을 필요가 있다. 실제 짐승은 필요한 이상의 야성을 자랑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야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대를 물어 죽이는 데 꼭 필요한 만큼의 완력이 작용한다.

이 영화의 폭력이 바로 그렇다. <황해>에 감정적으로 과잉된 인물은 보이지 않는다. 구남은 딱 한번 운다. 아파서 운다. 면가의 단호한 도끼질이 언제 멈추는가. 그는 이미 죽은 자에게 도끼질하지 않는다. <황해>의 인물들은 절박하다. <황해>에서 먼저 죽는 자들은 조금 덜 절박한 자들이다. 시스템이 먼저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이 땅 위에서, 절박한 자가 조금 덜 절박한 자를 이기는 풍경은 생소하고 과감하다. 그것은 어느 정도 판타지다. 연변이라는 이질감이 끼어들면서 이 판타지가 가능해진다. 연변으로부터 건너온 이 절박한 폭력은 남한의 기름진 폭력을 쉽사리, 생존과 야생의 이름으로 짓이겨 발아래 둔다. 별다른 전략이나 잔재주를 찾을 이유가 없다는 듯 야심만만하고 우직하게 전개되는 이 긴 시간의 영화가, 놀랍게도 그 모든 장면으로부터 육중한 확신을 관객에게 전달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 영화를 만든 자들이 짐승이든 거장이든 아무튼 백지 위의 마침표와 같은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명백하다. <황해>는 그 자체로 양손에 손도끼와 개뼈를 거머쥔 채 태평한 표정을 하고 내게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면가를 연상시킨다. 절박한 꼭 그만큼의 피가 마음껏 분출하는 이 영화에 정작 복잡한 갈등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아이러니다. 절박한 자가 덜 절박한 자를 이기는 판타지가, 이 아이러니를 통해 현실감을 찾는다. 언제나 동기는 단순하고 파장은 수직적이다. 많은 몫을 약속받은 자들의 단순하고 얇은 동기가, 적은 몫을 제 몸을 굴려 알아서 찾아 먹어야 하는 자들에게 죽음으로 전염된다. 그게 <황해>가 보여주는 ‘청부’이자 세상을 운영하는 체계의 실체다.

<황해>는 관객에게 짐승의 순간을 경험하게 만든다. 우리는 이 영화에서 쫓기고 죽인다. 도움을 바랄 곳은 없다. <황해> 속의 공권력은 <추격자>에서처럼, 거의 믿을 수 없는 수준으로 무능하고 초라하며 그나마 후반 이후에는 자취마저 잃어버린다. 도로 위의 추격 장면이 객관적으로 파악 가능한 시점으로 편집되지 않고, 거의 체험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롤러코스터가 아닌, 뒤에서 달려오는 롤러코스터를 두 발로 뛰어 피해야 하는 감정을 갖게 만드는 <황해>는 올 한해 가장 유별난 존재감을 증명하며 문제적인 걸작으로 자리잡았다.

허지웅 영화평론가

[한겨레 주요기사]

■“스폰서검사 사건에 아내가 ‘당신도 저러나’ 물어 당혹”
■ 박근혜 ‘대선용 싱크탱크’ 만든다
■ 윤수일, 은방울자매, 정보부원이 한 아파트에
■ 수도권 전셋값 오름세 확산 조짐이…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