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지웅의 극장뎐
<메가마인드>는 너무나 빤하게도, 슈퍼맨 텍스트의 변주다. 슈퍼맨을 정말 없애는 데 성공한 우주적 왕따 렉스 루터가 너무나 무료한 나머지 지미 올슨을 새로운 슈퍼영웅으로 만들어내고, 그 와중에 로이스 레인과 쿵짝이 맞아 연애를 하는 이야기인 셈이다.
영웅과 악당의 역할을 바꾼다는 <메가마인드>의 설정은,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볼 때 그리 과감한 변주는 아니다. 코믹스 세계에선 이미 수없이 많은 평행우주 속에서 파괴적인 설정의 슈퍼영웅들이 등장했다. 이를테면 어느 평행우주 속의 슈퍼맨은 미국 정부의 편에 서서 소련과 싸우며 레지스탕스가 된 배트맨과 대립했고(다크나이트 리턴즈), 미국이 아닌 소련에 떨어져 그곳에서 자란 뒤 스탈린의 후계자로서 이데아 건설을 향한 철권통치를 이끌기도 했다(레드 선). 악당이 영웅이 되는 수준의 역할 바꾸기 정도야 코믹스 세계의 파격에 비하면 하찮은 에피소드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어찌됐든 <메가마인드>는 슈퍼영웅 장르의 팬들에게 꽤 다양한 잔재미를 제공하는 데 성공한다. 지미 올슨의 변주인 타이탄이 슈퍼영웅의 탈을 쓴 슈퍼악당이 되는 과정은 꽤 신선하다. 특히 메트로맨과 메가마인드가 둘 다 외계로부터 왔다는 대목은 노골적인 렉스 루터의 변주인 메가마인드(그는 외계인임에도 초능력이 아닌 과학의 힘에 의존한다)에게 색다른 생명력을 선사한다. 출발은 똑같았으나, 타고난 외모와 환경이 그들을 슈퍼영웅과 슈퍼악당으로 성장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잘생긴 외계인은 슈퍼맨이 되고 못생긴 외계인은 프레더터가 되는 이 불공평한 세상에, <메가마인드>는 영웅과 악당을 가르는 기준의 상대적인 유동성에 관해 발언하고 있다. 언뜻 단순하고 얇은 흥겨움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아 보이지만, 이 지점만큼은 관객들에게 깊게 사유하는 꼭 그만큼의 각별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메가마인드>는 다음과 같은 명제로부터 출발한다. 모든 종류의 극단에는 반드시 다른 방향의 극단이 필요하다. 수구꼴통에게는 극좌가, 극좌에게는 수구꼴통이 반드시 요구된다. 그래야 서로의 유별난 정체성이 유지될 수 있다. 새삼 우리 주위의 풍경을 예시로 언급하지 않아도 이는 충분히 인지할 수 있는 사실이다. 슈퍼영웅과 슈퍼악당은 서로의 슈퍼, 한 자존감을 위해 반드시 존재하고 대립해야만 하는 것이다. 간신히 인내할 수 있는 수준의 진부한 설정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점만 제외하면 <메가마인드>는 다채롭고 유머러스하며 무엇보다, 사랑스러운 이야기다. 우리는 이 마음 약한 악당을 사랑하지 않을 재간이 없다.
<메가마인드>는 악인을 가장해 온갖 위악을 떠는, 이 땅의 모든 마음 약한 츤데레(겉으로는 싫어하는 듯하지만 속으로는 애정을 품고 있다는 뜻의 일본식 신조어)를 위한 송가다. 아무리 사악한 척 마음을 속여도 그는 결국 나약한 소년에 불과하다. 우리가 우리 주위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악랄한 악인을 떠올려보자. 그(녀)는 정말 그렇게 타고난 악마일까. 어쩌면 그들은 관심과 사랑에 목마른, 더불어 그런 정체성을 강요당한 인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혹시나 다른 무엇도 아닌 나 자신의 고결한 순혈주의적 강박이 그들을 만들어낸 것은 아닌지 고민해볼 일이다. 영화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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