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버 여행기>
이야기가 부여한 역할에 존재를 충실히 구겨 넣어 이야기를 고양시키는 배우들이 있는가 하면, 이야기보다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이야기의 빈틈을 채워버리면서 스스로 이야기가 되는 배우도 있다. 어느 쪽이 더 훌륭하다고 쉽게 판단하기는 어려운 문제지만, 적어도 <걸리버 여행기>를 본 이유는 순전히 후자에 대한, 그러니까 주인공 잭 블랙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그가 나오는 영화들을 즐겁게 보고 나서 거의 언제나 뒤늦게 깨닫는 건, 이야기 자체는 그리 특별할 게 없고 심지어 매번 유사한 인상을 준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잭 블랙이 등장하는 영화의 쾌락은 다른 무엇도 아닌, 인간 ‘잭 블랙’이라는 환상에의 몰입에서 온다. 그런데 이 환상은 어떤 숭고하고 짜릿한 액션이나 초현실적 상황이 아니라, 지나치게 현실적인 그의 육신과 밀접하게 닿아 있다. 둔탁하고 무거워 보여서 툭 치면 굴러갈 듯 보이는 그의 몸이 손끝, 발끝, 얼굴의 신경들, 거기에 더해진 속사포의 대사를 통해 여기저기로 섬세하게 분산될 때의 활력.
조너선 스위프트의 원작이 어떻게 현대적으로 변주되었는지에 관해서는 그러므로, 별반 호기심이 없었다. 오직 잭 블랙의 예의 그 활력이 그보다 몇십 배나 작은 사람들 틈에서 어떻게 조응하고 발휘되는지만 궁금했다. 소인과 대인의 대비가 주는 시각적 효과가 아니라, 이 소인국의 친구들에게 폭력이 되지 않으면서도 퍼덕이는 잭 블랙의 세밀한 육중함 말이다. 처음에 그가 걸리버 역을 맡는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존재 자체로 스펙터클하고, 엄숙하고 경직된 것들을 툭툭 건드리는 그가 소인국의 걸리버가 되기에 적격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동안 종종 이 역할이 잭 블랙에게 썩 잘 맞지 않는 옷처럼 느껴진다.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스쿨 오브 락>, <나초 리브레>, 심지어는 목소리만 연기한 <쿵푸 팬더>에서조차 잭 블랙의 진가는 그의 위상이 다른 사람들 틈에서 묻혀버리는, 지극히 평범한 루저라는 설정 위에서 펼쳐져왔다. 그는 영화 속 세상에서 눈에 띄지 않는 존재로 구석에 내팽개쳐져 있을 때나 홀로 중얼거릴 때, 그러니까 관객만이 볼 수 있는 상황에서 유독 이상한 개성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 영화 속 소인국에서 거인인 그의 존재는 이미 시각적으로 누구에게나 ‘비정상’의 범주에 속한다. 여기서는 사회의 적응자들 틈에서 때때로 그가 뿜어내는 불만, 욕망, 자학의 ‘비정상’적인 활력 대신, 컴퓨터그래픽이 만들어낸 그저 ‘비정상’적인 크기가 우선시된다. 영화가 소인국에서 잭 블랙의 활약상을 보여주기 위해 3디를 택한 건, 이 배우가 가진 날것 그대로의 섬세한 활달함을 과소평가한 결과인 것 같다. 그는 3디로 존재가 부각될 때가 아니라, 무리 속에 감춰진 가운데 스스로의 힘으로(그러나 영화 안에서는 다분히 무의식적인 표출처럼) 눈에 띄게 될 때 더없이 사랑스러워지는 배우이기 때문이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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