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수꾼>
[남다은의 환등상자]
어두운 공터에 슬금슬금 기어든 쥐들처럼 소년들이 모여 있다. 누군가는 때리고, 누군가는 맞고, 누군가는 아무렇지도 않게 구경한다. 인정투쟁이 끊이지 않는 작은 왕국. 이 익숙한 풍경이 없는 소년들의 성장담을 본 기억은 거의 없다. 그런데 그것은 정작 무엇을 인정받기 위한 폭력일까. 수많은 영화들이 말해준 것처럼, 그저 그건 수컷세계의 약육강식의 법칙이 반복되는 것이거나 이유 없는 사춘기의 분노거나, 그도 아니라면 불우한 가정사에 대한 반항일 따름일까. 윤성현의 <파수꾼>을 보며 문득, 폭력에 다쳐가는 소년들에게 지금껏 단 한번도 진지하게 그 이유를 물은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파수꾼>은 관습화된 답을 밀쳐내며, 영화 전체를 그러한 질문으로 만들고 있는 것 같다.
한때 기태(이제훈), 동윤(서준영), 희준(박정민)은 단짝 친구였다. 기태는 일명 학교 ‘짱’이지만, 동윤과 희준의 관계에서만큼은 그 어떤 권력관계도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가족사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는 기태도 동윤과 희준의 집은 거리낌 없이 드나든다. 그러나 사건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아주 작은 일을 계기로 기태와 희준의 관계가 멀어진다. 단지 멀어지는 게 아니라, 그들 사이에 짐승의 위계가 들어선다. 삼각형의 한 변이 무너지자, 남은 두 변은 버티지 못한다. 희준은 전학을 가고, 동윤은 기태에게 등을 돌리고, 어느 날 기태는 죽어버린다. 소년의 죽음. 그것은 영화의 엔딩이 아니라, 실은 영화의 시작이다. 아들의 느닷없는 죽음의 이유를 알지 못하는 무력한 아버지가 아들의 친구들을 하나씩 찾아가 만난다.
영화는 기태의 아버지가 친구들을 만나는 순간마다 소년들의 과거로 돌아간다. 그런데 이상하다. 거듭되는 플래시백으로 영화의 구조가 쌓아 올려질수록, 우리는 확신이 아니라, 불확신에 휩싸이게 된다. 그 플래시백들이 살아남은 누군가의 기억인지, 그 기억이 상대의 마음까지도 온전히 기억해낼 수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영화는 점점 기태의 죽음에 얽힌 수수께끼로부터 멀어지고, 이 복잡한 구조의 어디에도 반전이나, 비밀은 숨겨져 있지 않다. 우리가 보는 건 그저, 어디서부터 잘못되기 시작했는지 알기 어려운, 애처로운 어긋남들이다. 그러니 <파수꾼>의 형식은 그 자체로 소년들의 관계의 결처럼 보인다. 아무런 답도 주지 않은 채 영화가 그렇게 끝날 무렵, 살아남은 소년이 현재의 문을 열고 과거로 들어가서 죽은 친구와 마주하는 장면에서, 비로소 우리는 이 영화의 본심과 마주하게 된다. 그 시절 소년들이 서로에게 애타게 인정받고 싶어 하던 그 마음, 집착과 폭력과 애걸로 돌변하던 그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소년들의 잔혹함, 그것은 감정이 없어서도, 넘치는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서도 아니라, 알아봐주는 이가 없어 외롭게 내팽개쳐진 마음이 짐승이 되어 울먹이는 소리다.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소년들의 폭력을 무심한 오해 속에 가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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