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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귀 기울이면 들릴까요…봄이 오는 소리가

등록 2011-03-06 20:35

<두만강>
<두만강>
장률 감독의 ‘두만강’
사실과 환상 섞은 두만강변 탈북자·조선족 삶
얼어붙은 화면에 아이들의 눈물과 우정 대비
#1 낮

얼어붙은 두만강 복판. 카메라가 상류를 향해 고정돼 있다. 멀리 돌아가는 강 굽이를 겨울산이 감싸고 있다. 두 인물이 화면 왼쪽에서 작게 나타나 기역(ㄱ) 자를 그리며 다가온다. 뿌드득 뿌드득 점점 커지는 발자국 소리가 이가 시릴 정도로 스산하다. 옷을 단단히 여민 중년 남녀다. 카메라가 천천히 아래를 향하면 널브러진 아이 하나가 보인다. 죽었나? 갑자기 아이가 일어나 달아난다. “창호 아이가?”

#2 저녁

빈집. 모닥불 주위에 아이들 셋이 불을 쬐고 있다. 입성이 초라하고 표정이 없다. 쿨룩쿨룩. 짚더미 위에 한 아이가 누워 있다. 또다른 아이들 서넛이 들어온다. 잠시 수하. 배고프다, 먹을 걸 달라. 그러마, 대신 조건이 있다. 아랫마을과 축구시합이 있는데 우리와 같이 뛰자. 투먼(도문) 쪽 아이 창호(최건), 강 건너서 온 정진(이경림)이다. 잠시 뒤 아이들은 빵을 입에 욱여넣는다. 쿨룩쿨룩. 먹는 아이들은 누운 아이한테 눈을 주지 않는다.


#3 밤

창호네 집. 멀리서 땅땅거리는 소리. 얼음장 깨지는 소리인가, 총소리인가. 잠시 뒤 문 두드리는 소리. 세 사람 모두 잠이 깬다. 일어나 전깃불줄을 당긴 이는 할아버지다. 수하. 문고리를 풀자 허겁지겁 들어온 사내. “살려주십쇼. 강 건너서 왔슴다.” 과연 어떻게 할까? “밖에 창고에서라도 자고 가게 해줍셔.” 할아버지는 담담하게 사내를 일으켜 세운 뒤 이불 한 채를 주어 내보낸다.

장률 감독의 <두만강>은 배경에서 시작한다. 이창동 감독의 <시>와 흡사하다. 두만강은 하얗게 얼었고 북한강은 검게 흐른다. 장률의 아이는 살아 있고, 이창동의 아이는 죽었다. 배경이 내용을 함축하는 것 또한 흡사하다. 강은 곧 생명으로 흘러야 한다. 하지만 두만강은 국경이 되어 얼어붙었고 한강은 탐욕으로 오염돼 있다. 문제의식은 연변대 중문학 교수이자 소설가에서 감독으로 변신한 이력만큼이나 비슷하다. 영화인과의 대화 도중 “영화는 아무나 만들 수 있다”고 큰소리친 게 빌미가 되어 영화와 엮인 그는 <망종>(2005), <경계>(2007), <이리>(2008) 등 발표하는 작품마다 특유의 작가주의적 시선으로 여러 영화제에서 주목을 받았다.

둘째 장면에서 인문지리적 배경으로 넘어간다. 소년들이 주고받는 몹시 짧고 무뚝뚝한 말투. 북조선 양강(량강)도 사투리, 중국 투먼 조선족 말일 터. 소속한 나라는 다르지만 말이 통하니 그들이 쓰는 말은 ‘두만강 사투리’쯤 될 터이다. 국경으로 굳어지기 전에는 수시로 왕래하던 것. 어른들의 말에는 ‘왕년’의 기억이 배어 있어 북한은 ‘강 건너’라고 한다. 강 건너 아이들은 먹을 것을 구하러 왔고, 궁기와 위험으로 동무를 돌아볼 겨를이 없다. 아이들이 쓰는 문장과 단어는 남한 말과 같은데 억양이 너무 달라 자막이 없다면 알아듣기 힘들다. <두만강>은 그만큼 먼 이야기를 한다.

뜸을 들인 장 감독은 이쯤에서 보따리를 풀어 헤친다. 이름도 성도 모르는 사내가 창호네 집 문을 두드리는 것을 신호로 해서. 그 집은 조손가정. 할아버지, 창호와 순희 남매다. 아버지는 큰물 때 죽고 엄마는 남조선에 돈 벌러 갔다. 이튿날 할아버지와 손자를 시내로 보내면서 장 감독은 집안 사정을 밝히는 동시에 이야기도 함께 전개한다. 엄마는 고된 일에 몸이 시원치 않고 비싼 약을 사먹을 형편이 못 돼 값싼 중국약을 사서 보내야 한다. 엄마는 목소리로만 존재하고 순희를 물에서 구해내고 떠내려간 아버지 대신 물에서 올라온 사내는 순희를 겁탈한다. 순희가 사내를 깨워 집 안으로 들여 밥을 차려주자 술타령을 하고 사내는 간이 붓게 된 것. 벙어리 순희의 어버버 비명이 북조선 지도자를 찬양하는 텔레비전 볼륨에 묻힌다. 참고로 그곳에서 ‘벙어리’는 비하의 뜻이 없고 다만 ‘말을 못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통하는 예삿말이다.

<두만강>은 엄청 춥다. 눈은 시시로 내려 쌓여 얼어붙고 사람들은 점점 강퍅해진다. 강 건너 사람들이 출몰하면서 쌀독이 비고, 널어둔 명태가 사라지고, 우리의 양이 모자란다. 그들이 불쌍한 이웃에서 거지와 도둑으로 바뀔 즈음 중국 정부에서는 포상금으로 신고를 장려하고 강의 양쪽 사람들 사이에 균열이 생긴다. 아이들의 우정에도 당연히 금이 간다.

하지만 감독은 첫머리에서 비친 것처럼 아이들한테서 희망을 본다. 창호가 널브러져 있던 것은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있던 것. 공안들이 탈북자들을 잡아가고, 탈북자를 도와주던 이가 잡혀가도 어른들은 정지화면처럼 꿈쩍 않지만 아이들은 울고, 따라가는 영화의 몸통은 첫 장면의 반복이다. ‘어른들의 시대’가 가고 ‘아이들의 시대’가 오면 두만강은 생명의 강으로 흐르지 않겠는가. ‘시네아티스트’라는 별칭답게 장 감독의 <두만강>에는 소설적 사실과 시적 환상이 버무려져 있다.

# 엔딩

<두만강>
<두만강>

눈이 펄펄 내리는 강. 화면 3분의 2쯤을 가로지른 한 일(一)자 다리. 오른쪽에 허리 굽은 노인이 나타난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화면 왼쪽 끝까지 걸어간다. 소리 없는 롱테이크. 순희가 상상으로 그린 다리를 건너 치매노인이 이르는 곳은 기억 속의 고향이다. 17일 개봉.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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