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 영화 감독
천년 한지의 가치 깨닫는 과정
유장하면서도 빠르게 풀어내
노장의 첫 디지털 촬영도 눈길
유장하면서도 빠르게 풀어내
노장의 첫 디지털 촬영도 눈길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 임권택 감독
<달빛 길어올리기>는 임권택(75) 감독의 101번째 작품. 1962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데뷔해 <천년학>(2006)으로 100번째를 찍고 그다음 영화다. 데뷔 심정으로 찍었다는 이 영화는 1996년 <축제> 이후 15년 만에 선보이는 현대물로 전통 한지를 소재로 삼았다. 퇴직 전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한지과로 전과한 만년 7급 공무원이 한지의 가치를 깨닫고, 천년 가는 한지를 복원하는 데 참여한다는 게 줄거리. 박중훈이 극중 이야기를 끌어가고 강수연이 다큐작가로 등장해 박중훈과 티격태격하면서 한지에 관한 사실을 설명하는 역할이다.
한지는 임 감독 말마따나 1년 반을 취재하고 4개월 동안 영화를 찍고도 더 얘기를 해주겠다는 사람이 나올 정도로 낯선 소재. 드라마와 다큐를 접목할 수밖에 없는 <달빛 길어올리기>는 새로운 시도였고 결과물은 유장하면서도 템포가 빠른 특징을 보인다. 아날로그 세대인 그가 디지털 촬영에 도전한 점에서도 주목된다.
13일 만난 임권택 감독은 “영화는 내 삶이고, 체험의 누적”이라며 “귀신이 나를 영화판에 끌어다 놓은 것 같다”고 말했다.
-흥행이 잘 될 것 같나?
“100편을 찍었지만 매번 초조하다. 저지르는 편이라 번번이 낯선 소재다. 판소리 영화(<서편제>)처럼 한지도 그런 소재라 결과를 알 수 없다. 나는 만족하지만, 관객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예측이 한번도 맞은 적이 없다.”
-한지전도사가 다 된 것 같다.
“중국은 국가가 지원하는 선지가 세계 시장에서 팔린다. 일본에는 화지가 있다. 몇 해 전만 해도 한지를 일본에 수출하면 일본인들은 그걸 가공해서 자기네 종이라고 해서 팔기도 했다. 이제는 그런 것도 안 한다. 세계에서 종이의 질이 가장 좋은 한지는 이제 존재감이 없다. 딱하다. 예로부터 좋았던 것들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 하지만 잘 알지 못하면서 괜히 대들었다는 후회도 했다.” -정일성 촬영감독 없이 찍은 첫 디지털 영화인데. “필름이라면 정 감독과 찍었을 것이다. 디지털은 화질이 거칠고 심도도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국내 대표적인 필름현상소가 4~5년 안에 문을 닫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충격받았다. 영화를 계속한다면 남들 만드는 걸 구경하면서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디지털을 체험하려 했다.” -강수연과는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 이후 22년 만에 호흡을 맞췄는데. “그와는 큰 인연이 있다. (나와 함께 작업해) 스무살 무렵 2년 새 세계적 상을 두 개나 탔다. 그 뒤로 각자 다른 길을 갔다. 나도 나이 먹고 그도 마흔이 넘었는데 배우로서 자신의 매력이 너무 알려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하길 잘했다.” -호흡은 잘 맞았나? “편·불편 문제는 아니다. 나이가 주는 무언가가 있다. 20대에 들여다보는 삶과 40대가 들여다보는 삶은 다를 것이다. 나도 나이에 걸맞은 영화를 찍었다고 생각한다. 80살을 바라보는 내가 젊은 감독들의 영화적 재미를 흉내 낼 수 없듯이 젊은 사람들 역시 나처럼 나이가 박인 영화를 찍을 수 없을 것이다. 영화는 삶이고, 체험의 누적이다.”
-배우들과 생활인들이 함께 출연한다.
“박중훈, 강수연 등 연기자와 연기를 안 해본 생활인이 부딪혔을 때 조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이상한 영화가 될 게 뻔했다. 연기자들은 생활인에 맞춰 연기를 조절해야 했고 생활인들은 촬영 중에 자신들의 ‘흥’ 안으로 빠져들어 갔다. 드라마틱한 허구가 아니라 삶의 현장을 들여다보듯이 찍었다.”
-부인과 아들이 영화에 등장하는데.
“연기자들이 펑크를 냈다. 마침 내 몸이 안 좋아 아내가 현장에 있었다. 연출부에서 사모님이 때워야 하지 않겠느냐고 몰아붙인 것 같다. 배우를 지망하는 아들에게는 ‘아버지가 도와줄 길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임아무개 아들이라고 내 영화에서 좋은 역할을 한다면 영화계의 시선이 곱지 않을 거다. 하지만 애비로서 아이가 배우감인지 아닌지 점검해봐야 했다.”
-마지막 달빛 이미지가 인상적이다.
“실제 천년 가는 종이를 만든다는 게 가능한지는 모르겠다. 영화처럼 폭포수 아래서 천년종이를 만들어내는구나라는 생각으로 보면 안 된다. ‘저 미친 사람들이 그 좋다는 종이 안으로 깊이 미쳐가고 있었구나’, 그런 미침과 달밤의 분위기도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50년 영화인생 후회는 없나?
“진짜 운이 좋은 놈이라 생각한다. 한국전쟁 때 부산에서 노동판을 전전하다가 영화 제작하시는 분들과 인연이 닿았다. 영화를 본 적도 없으니 영화에 대한 꿈이 있을 리 없다. 밥은 먹고 살겠지라는 생각으로 시작한 건데, 결국 내가 좋아서 할 수 있는 직업과 만난 셈이 됐다. 꼭 귀신이 나를 영화판에 끌어다 놓은 것 같다.”
-영화를 하면서 소중했던 점은?
“우리 사모님(배우 채령)을 만난 게 소중했다.(웃음) 나는 이전에 영화감독보다 술꾼으로 더 유명했다. 결혼으로 술을 자제하게 되고 오로지 영화만 생각하며 살 수 있었다. 어렵게 생활을 꾸려가야 하는데 한번도 골치 아프게 한 적이 없다. (아내 자랑을 하니) 꼭 팔불출 같다.”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중국은 국가가 지원하는 선지가 세계 시장에서 팔린다. 일본에는 화지가 있다. 몇 해 전만 해도 한지를 일본에 수출하면 일본인들은 그걸 가공해서 자기네 종이라고 해서 팔기도 했다. 이제는 그런 것도 안 한다. 세계에서 종이의 질이 가장 좋은 한지는 이제 존재감이 없다. 딱하다. 예로부터 좋았던 것들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 하지만 잘 알지 못하면서 괜히 대들었다는 후회도 했다.” -정일성 촬영감독 없이 찍은 첫 디지털 영화인데. “필름이라면 정 감독과 찍었을 것이다. 디지털은 화질이 거칠고 심도도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국내 대표적인 필름현상소가 4~5년 안에 문을 닫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충격받았다. 영화를 계속한다면 남들 만드는 걸 구경하면서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디지털을 체험하려 했다.” -강수연과는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 이후 22년 만에 호흡을 맞췄는데. “그와는 큰 인연이 있다. (나와 함께 작업해) 스무살 무렵 2년 새 세계적 상을 두 개나 탔다. 그 뒤로 각자 다른 길을 갔다. 나도 나이 먹고 그도 마흔이 넘었는데 배우로서 자신의 매력이 너무 알려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하길 잘했다.” -호흡은 잘 맞았나? “편·불편 문제는 아니다. 나이가 주는 무언가가 있다. 20대에 들여다보는 삶과 40대가 들여다보는 삶은 다를 것이다. 나도 나이에 걸맞은 영화를 찍었다고 생각한다. 80살을 바라보는 내가 젊은 감독들의 영화적 재미를 흉내 낼 수 없듯이 젊은 사람들 역시 나처럼 나이가 박인 영화를 찍을 수 없을 것이다. 영화는 삶이고, 체험의 누적이다.”
임권택 감독의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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