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산일기
고 전승철씨 유언에 결심 ‘정착기 상처’ 고스란히 찍어
“반대 있었지만 현실 알려야죠”…국제영화제서 호평
“반대 있었지만 현실 알려야죠”…국제영화제서 호평
박정범 감독·주연 ‘무산일기’
대학생 박정범씨가 탈북자 전승철씨를 처음 만난 건 학교에서였다. 박씨가 다니던 체육교육과에 전씨가 재외국인 특별전형으로 들어온 것. 마음이 잘 맞은 둘은 형제처럼 어울렸다. 박씨가 전씨의 삶에 다가갈수록 남들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탈북자들의 일상과 고민, 아픔이 전해져 왔다.
기타노 다케시 감독·주연의 일본 영화 <하나비>를 보고 충격을 받은 박씨는 홀로 영화 공부를 시작했다. 재미로 만든 단편 <사경>은 학교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았고, 이어 만든 단편 <사경을 헤매다>는 2001년 부산아시아단편영화제 대상과 관객상을 받았다. 대학 졸업 뒤 동국대 영상대학원에 진학한 그는 몇몇 단편을 만들었지만, 아직 부족하다는 이유로 서랍 속에 감춰뒀다.
박씨 영향을 받은 탓인지 전씨도 영화 일을 하고 싶어했다. 박씨는 자신이 조감독을 맡은 영화 제작부에 전씨를 취직시켰다. 좋아하는 선배와 좋아하는 영화 일을 하며 행복해하는 전씨를 하늘이 질투한 걸까? 전씨는 덜컥 위암에 걸려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전씨는 박씨에게 말했다. “형, 탈북자 얘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했지? 내 얘기를 영화로 만들어 봐.”
박씨는 서둘렀다. 각본·연출에 직접 극중 전승철 역을 맡아 단편 <125 전승철>을 완성했다. ‘125’는 탈북자 남자 주민등록번호 뒷자리에 일괄적으로 부여되는 숫자. 일종의 ‘주홍글씨’다. 박씨는 전씨에게 영화를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전씨는 영화를 볼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영화 완성 이틀 뒤 전씨는 세상을 떠났다. <125 전승철>은 2008년 미쟝센단편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을 받았다. 이를 눈여겨본 이창동 감독은 박씨를 <시> 조감독으로 영입했다.
전씨가 떠난 지 몇달 뒤, 박씨는 오랜만에 미니홈피 쪽지함을 열어보고 깜짝 놀랐다. 전씨가 숨지기 일주일 전 보낸 쪽지가 있었다. “형이 만든 장편영화를 꼭 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하게 돼 아쉬워. 형은 언젠가 반드시 좋은 영화를 만들 거고 좋은 감독이 될 거라 믿어.” 그때까지 ‘죽은 친구 얘기를 또다시 영화 소재로 써도 될까’ 하는 고민에 빠졌던 박씨는 장편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이건 꼭 영화로 찍어야 하는 이야기”라는 이창동 감독의 조언도 큰 힘이 됐다.
박씨가 영상대학원 졸업영화로 넉달 만에 찍은 장편 <무산일기>는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125 전승철>처럼 이번에도 극중 ‘전승철’을 직접 연기했다. <무산일기>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상과 국제영화비평가협회상을 시작으로 모로코 마라케시국제영화제 대상, 네덜란드 로테르담국제영화제 대상 등을 거머쥐며 단숨에 세계 영화계가 주목하는 작품으로 떠올랐다.
<무산일기>는 실존 인물에서 출발했지만 어디까지나 픽션이다. 극중 ‘전승철’이라는 캐릭터와 이야기의 큰 줄기는 모두 박 감독이 재창조했다. 박 감독은 “승철이는 밝고 활달했지만, 남한에 쉽게 적응할 수 없었던 승철이의 아픔을 표현하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에 약간은 어두운 캐릭터로 설정했다”고 밝혔다.
극중 전승철은 말이 없고 무뚝뚝하지만 한없이 순수하다. 아픔과 상처를 속으로 삭이며 버텨온 승철. 하지만 그도 이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변해야 한다. 그 지점을 영화는 담담하게 비추면서도 강렬한 인장을 새긴다.
“북한에서 왔단 말 하지 마. 그냥 열심히 하겠다고만 해. 살아남아야 할 것 아냐.” 형사가 승철에게 일자리를 소개해주며 건네는 말 안에 뼈가 있다. 탈북자들은 자기들끼리 조촐하게 차린 생일상 앞에서 자조한다. “기껏 시간당 4천원, 5천원 받으려고 목숨 걸고 왔니?” 영화에 나온 것처럼 탈북자가 탈북자를 상대로 사기를 치고, 그 사기꾼을 잡으러 몰려다니는 일은 실제 탈북자 사회에서 부지기수라고 한다. 탈북자들은 박 감독에게 “왜 이런 영화를 찍느냐. 우리도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데 왜 찬물을 끼얹으려 하느냐”고 항의하기도 했다고 한다.
박 감독은 말했다. “단순히 탈북자를 소재로 활용해 돈 벌고 주목받는 데 그칠 거라 생각했다면 절대 영화를 찍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고민 끝에 결심했습니다. 탈북자 분들은 별로 안 좋아하시겠지만, 다른 많은 분들이 이런 현실을 알아야만 한다는 생각에 만든 영화입니다.” 4월14일 개봉.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사진 영화사 진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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