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리언2>
[허지웅의 극장뎐]
1987년, <에이리언 2>의 흥행에 고무된 20세기 폭스는 당연하다는 듯 프랜차이즈의 다음 시리즈를 준비하고 있었다. 감독이 필요했다. 먼저 물망에 오른 건 레니 할린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사공들이 오고 가는 동안 거의 1년이 무의미하게 지나갔다. 레니 할린은 제작자 데이비드 길러를 찾아가 “못 하겠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다이하드 2>를 연출하러 떠났다.
두번째 연출자는 빈센트 워드였다. 폭스의 운영진은 시나리오가 특이하다며 좋아했다. 목제로 만들어진 행성이 있고, 지구의 과학 문명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수도사처럼 살아간다. 거기 리플리와 뉴트, 힉스, 그리고 비숍이 타고 있는 술라코가 불시착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에이리언 3>의 아이디어가 거의 대부분 여기서 출발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폭스로부터 엄청난 분량의 수정 목록을 받아 든 워드는 가운데 손가락을 올리며 프로젝트를 걸어 나갔다.
마지막으로 합류한 게 신예 데이비드 핀처였다. 광고 경력은 리들리 스콧을, 아이엘엠(ILM) 미술 경력은 제임스 캐머런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그러나 영화는 이미 절반쯤 가라앉은 타이태닉이었다. 29살의 젊은 신인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는 실제 현장에 투입되면 모든 걸 뜻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리들리 스콧의 1편은 제작비가 얼마 들지 않았다. 2편의 제임스 캐머런에게는 직접 쓴 훌륭한 시나리오와, 마침 개봉한 <터미네이터>의 흥행 전력이 있었다. 핀처에게는 재능밖에 없었다. 제작사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없었다. 이건 예정된 지옥이었다.
빈센트 워드의 시나리오를 기준으로 이미 세트 작업이 진행되는 중이었다. 엄청나게 지출된 제작비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수도사를 죄수로 바꾸고 몇 가지 설정을 교체하는 수준에서 촬영이 진행됐다. 완성된 시나리오가 없었다. 핀처 또한 쓰려 하지 않았다. 거의 매일 각본이 수정되는 가운데 카메라가 돌아갔다. 제작자들은 매일마다 현장에 나와 핀처를 감시했다. 마이클 빈은 힉스의 시체에서 에이리언이 튀어나온다는 설정을 듣고 소송을 제기했다(나중에 후회했다). 1편에 이어 새로운 에이리언 모델을 제작한 H.R 기거는 피드백이 오고 가는 와중에 ‘삐졌다’. 엔딩이 결정되지 않아 촬영이 중단되고 배우와 스태프가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동안 머리카락이 자란 시고니 위버가 더이상 삭발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추가 출연료 협상을 시작했다(가발을 쓰는 걸로 합의됐다).
이 추잡한 속편의 비화를 전부 털어놓기에는 지면이 모자란다. 결국 핀처는 편집이 시작되기 전 이건 내 영화가 아니라며 손을 떼었다. 거대 제작사에서 데뷔한 신인에게 치명적인 행동이었다. 이건 캐머런의 <피라냐 2>처럼 농담 같은 영화가 아니었으니까. 감독이 없는 편집 과정 또한 졸속으로 이루어져 반드시 필요한 장면들이 빠졌다. 이 매혹적으로 어두운 영화는 결과적으로 엉성했다. 미국에서는 흥행에 실패했다. 다만 유럽과 아시아, 특히 한국에서 흥행했다. 핀처는 이후 <에이리언3>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디브이디 박스세트 작업에도 4명의 감독 가운데 유일하게 참여하지 않았고 감독판은 무산되었다(대신 리플리가 발견되는 과정이나 에이리언 숙주가 개에서 황소로 바뀌는 등 편집 과정에서 사라지거나 폭스에 의해 거절된 장면들이 교체, 추가되었다).
핀처의 두번째 영화는, <세븐>이었다. 그리고 <파이트 클럽>과 <조디악>, <소셜 네트워크>를 연출했다. 처참한 데뷔작의 기억 이후 핀처는 두 번 다시 통제할 수 없는 기획을 맡지 않았다. 그는 강박적인 완벽주의자가 되었다. 믿을 수 있는 전문 작가 없이는 결코 발을 담그지 않았다. <파이트 클럽>을 제외하면(그나마 실제 작업은 자기 이름의 제작사가 맡았다) 폭스와도 더이상 작업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우리 세대에 존재하는 다음 세대의 거장으로 핀처를 떠올린다. <에이리언 3>의 끔찍한 기억 없이 그가 그리 될 수 있었을까? 누가 알겠느냐만.
어찌됐든, 가장 나쁜 시간을 견뎌낸 사람들이 모두 교훈을 얻는 것은 아니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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