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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솔직함은 힘이 세다

등록 2011-04-24 19:36

<무산일기>
<무산일기>
[남다은의 환등상자] <무산일기>

덥수룩한 머리, 어딘지 사연을 숨겨 놓았을 법한 표정 없는 얼굴, 어깨를 꼿꼿하게 펼 때보다 한쪽 구석에 웅크릴 때가 더 익숙해 보이는 자세의 이 사내는 한번 보면 잊기 어려운 인상을 지녔다. 그의 이름은 전승철,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125로 시작되는 탈북자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라고 언제나 힘주어 부탁하고 스스로 다짐하는 전승철의 진심이 무색하게, 한국 사회가 그에게 준 기회라고는 벽보를 붙이는 일용직이다. 그마저도 동네 건달들의 텃세로 끊임없이 위협을 당한다.

결국 그는 자신보다 이 사회에 아주 조금 더 능숙한, 그러나 별반 처지가 다르지 않은 노동자들과의 비참한 경쟁에서 자꾸 밀릴 수밖에 없다. 범법자가 되지 않고서는 스스로 이 밑바닥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그 어떤 조건도 갖지 못했다. 그러니 이제 그가 이 쳇바퀴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좋은 이웃,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그러나 영화가 생각하기에 한국은 그런 가능성이 존재하는 땅이 아니다. 전승철과 함께 사는 탈북자 친구는 겉으로는 한국의 자본주의에 전승철보다 영악하게 적응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다른 탈북자들에게 사기를 쳐서 살길을 찾고 있다. 탈북자의 딱지를 달고 늘 혼자 다니던 전승철이 그나마 어떤 주홍글씨도 없이, 그저 평범한 남자로 무리 안에 섞이는 때는 교회에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신앙심 가득한 사람들의 미소가 그를 둘러쌀 때, 그는 가장 이질적인 존재로 보인다. 교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교인들과 전승철 사이에서 느껴지는 가장된 평등함은 우리에게 아무런 위안도 주지 못한다.

감독의 친구였으나 지금은 하늘로 떠난 전승철을 모델로 하는 이 영화는 감독의 단편 <125 전승철>의 확장본이며, 감독 자신이 전승철을 연기했다. 이 영화를 두고 이창동 영화와의 연관을 언급하는 이들이 많은데,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이를테면 카메라가 인물의 고통을 함께 감내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관찰로 밀어붙인다는 점, 인물을 고통으로부터 빠져나오게 할지 모르는 기회들, 혹은 기대들을 차례로 좌절시킨 다음, 인물이 그 과정을 어떻게 견디고, 요동치고, 적응하고, 살아남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때 이창동 감독이 이 사회를 사는 인간의 윤리에 대해 파고든다면, <무산일기>는 그런 인간을 낳은 한국 사회의 풍경에 좀더 치중을 한다.

타자를 전면화하는 사회 드라마들이 주로 빠지는 함정은 그들을 무결점의 피해자, 순결한 존재로 일단 규정해놓고 시작한다는 데 있다. 그건 사회 비판이 아니라 또다른 편견이며, 타자를 대상화하는 일종의 환상이다. 타자를 독립된 개체로 가감 없이 들여다보는 일과 그가 살고 있는 세상을 날카롭게 바라보는 일을 양립하는 작업은 그래서 어렵다. 영화가 전승철에게 떠안긴 일련의 혹독한 과정들, 그리고 끝내 그가 맞이하는 결말은 이 쉽지 않은 문제에 대해 유효한 질문들을 던지게 한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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