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르, 천둥의 신>
[허지웅의 극장뎐]
촬영 첫날이었다. 앤서니 홉킨스와 크리스 헴스워스가 처음으로 아스가르드의 갑옷을 입고 만났다. 서로의 모습을 보고 웃음 지은 뒤 앤서니 홉킨스가 말했다. “맙소사, 여기에선 연기가 필요 없겠군.”
<토르, 천둥의 신>은 마블 코믹스(미국의 저명한 만화책 출판사 마블의 만화들)의 생태계에 별 지식이 없는 관객들에게 다소 난감한 기획이다. 케네스 브래너가 연출을, 내털리 포트먼이 연기를 하든 말든 이건 결국 북유럽의 신이 지구에 내려와 망치를 들고 악당과 싸우는 슈퍼히어로 영화니까 말이다. <토르>가 내년에 도착할 <어벤저스>의 초석이라는 사실을 감안해도 마찬가지다. 우리 민족의 시조 단군이 박달나무로 만든 무기를 들고 악당과 싸우는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고 크레디트(배우·제작진 등의 이름을 기록한 자막)가 모두 올라간 이후 “2편에는 환웅도 나옵니다”라는 문구를 발견한 외국인의 복잡한 심정과 다를 게 없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토르>는 생각보다 훨씬 근사한 유머와 액션을 겸비한, 재미있는 오락물이다. 다만 <어벤저스>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다른 영화들(<아이언맨> <인크레더블 헐크> 등)에 비해 온전한 작품의 의미보다는 징검다리로서의 역할에 더 치중한다. 최소한 극 중 브루스 배너(헐크)나 토니 스타크(아이언맨)를 언급하는 대목 등에서 흥분할 수 있는 관객이라면 <토르>는 의미있는 경험이 될 수 있을 거다.
이야기는 지구를 비롯해 9개 세계를 관장하는 신들의 행성, ‘아스가르드’로부터 시작된다. 신들의 왕 오딘은 아들 토르를 후계자로 점찍어두었지만 그의 급한 성격과 난폭한 행동을 우려한다. 결국 토르가 모종의 실수를 저지르자 오딘은 그에게서 힘(뮬니르)을 빼앗고 지구로 추방한다. 토르는 지구 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이 와중에 토르의 형제 로키가 야욕을 드러내면서 아스가르드는 혼란에 빠진다.
내용은 원작의 설정을 조금 비껴간다. 토르의 인간 인격인 도널드 블레이크는 극 중 토르의 가짜 신분으로 축소됐다. 아버지 오딘에 의해 기억이 지워진 채 지구로 추방당한 뒤 ‘닥터 도널드 블레이크’로 살아가면서 토르로 각성할 때까지 10년이 걸린다는 설정도 생략됐다. ‘누군가가 너를 위해 눈물을 흘려줄 때 힘을 되찾을 수 있다’는 오딘의 주문은 원작에선 토르가 아니라 로키에게 내려진 것이었다. 토르의 연인 제인 포스터의 직업도 간호사에서 과학자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 영화의 발목을 잡는 건 이런 것들이 아니다. <토르>가 한 편의 온전한 슈퍼히어로 영화로서 갖는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슈퍼 악당의 부재에서 발견된다. 슈퍼맨에게 렉스 루터가, 배트맨에게 조커가, 캡틴 아메리카에게 레드 스컬이 있다면, 토르에게는 로키가 있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로키는 ‘슈퍼 악당’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기에 그럴 만한 동기나 합리성이 너무 빈약하다. 지구에서 지낸 며칠 동안 손바닥 뒤집듯 순식간에 성격이 바뀌고 영웅으로 각성하는 토르 또한 동기가 앙상한 건 마찬가지인데, 로키의 어두운 면이 납득할 만한 수준이었다면 토르와 관계없이 영화의 톤이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판권 장사를 그만두고 아예 직접 제작사를 차려 마블 유니버스를 하나씩 영화화하고 있는 마블의 야심은 이제 <어벤저스>를 통해 첫번째 유의미한 심판대에 오른다. <아이언맨> <인크레더블 헐크>의 ‘엔딩 크레디트’ 이후 ‘보너스 쿠키’들은 모두 <어벤저스>로 가는 이정표였다. <어벤저스>가 흥행에 성공하면 마블이 스크린 위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배로 늘어난다. 단지 특정 영웅 캐릭터를 중심에 둔 기획에서 벗어나 ‘시빌 워’ ‘시크릿 워’와 같은 이벤트 중심으로 이야기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아이언맨, 헐크, 토르, 캡틴 아메리카 등이 모두 출연하는 <어벤저스>는 2012년 공개된다(헐크 역의 에드워드 노턴만 마크 러펄로로 교체되고 모두 같은 배우들이 연기한다). 징검다리를 자처한 <토르>에 미안해서라도 <어벤저스>는 제대로 나와줘야 할 텐데.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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