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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진짜와 가짜, 사랑도 잴 수 있나

등록 2011-05-22 20:11

영화 <사랑을 카피하다>의 한 장면
영화 <사랑을 카피하다>의 한 장면
[남지은의 환등상자] <사랑을 카피하다>
남자는 복제품의 가치가 원본을 넘어설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방금 출판 기념회를 마친 영국인 작가다. 여자는 원본의 고유한 가치를 믿고 싶어 한다. 그녀는 진품과 모조품이 공존하는 골동품 가게를 운영한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정열적인 태양 아래에서 만난 두 남녀는 본질과 모방에 대해 다양한 예들을 넘나들며 지적인 토론을 이어간다. 그 토론은 이성과 감성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지속된다. 남자가 사유의 단계를 설명할 때, 여자는 휘몰아치는 감정으로 보여준다. 어쩐지 상투적인 이분법이라고?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남남이었던 둘이 어느새 서로에게 남편처럼, 아내처럼 굴고, 사람들 앞에서 부부로 행세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러니까 토론의 내용이 이들의 몸으로 구현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이성과 감성으로도, 원본과 복제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이상한 세계의 기운을 목격하게 된다. 이들은 진짜 부부 같다. 아니, 부부인가? 그들은 사랑을 연기하는 것 같다. 아니, 진짜 사랑하는 걸까?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사랑을 카피하다>는 원본과 모방에 대한 예술의 오랜 화두를 영화적으로 형상화해서 현실과 영화의 관계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런데 고대부터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반복되어온 이 쟁점 자체가 아니라, 영화가 여기에 ‘사랑’에 대한 사유를 섞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부부 역할을 수행하는 남자와 여자를 보며, 이들이 혹시 진짜 부부일까, 혹은 진짜 부부가 될까를 고민하던 우리는 어느새 진짜이건, 가짜이건 그 진위가 더는 중요하지 않다고 느끼는 순간에 도달한다.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은 남녀가 실은 공유된 경험 없이도, 하나의 사건에 의견차를 보이는 부부처럼 다툴 때, 우리가 이 장면에 정서적으로 이입하게 된다면, 그건 무슨 의미일까. 우리는 그 어떤 인과관계보다도 오직 그 순간 둘 사이에서 보이는 감정적 흐름에만 동화되는 것이다. 이들이 지금 연기를 하는 건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고 오직 한 사람의 액션과 그에 대한 다른 사람의 리액션의 교환, 그 교환에서 발생하는 정념만이 존재하는 것. 결국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닌가, 라고 영화는 묻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영화 속 여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키아로스타미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그녀는 알고 보면 상대의 행위나 말에 반응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면에만 반응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녀는 자신의 액션에 스스로 리액션한다. 그녀가 일분에도 수만가지 감정의 변덕을 부리는 것처럼 그려지는 건 그런 의미에서 어쩔 수 없다. 상대의 자리에 누가 앉아도 결국은 똑같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그녀가 거울을 보며 새빨간 립스틱을 칠하는 장면이나, 카메라 정면을 보며 마치 혼자 떠들고 있는 듯 찍힌 그녀의 얼굴이 어딘지 기괴하게 일그러지고 위태로운 슬픔을 주는 건 그 때문이다. 이 피곤하고 절박하고 집요한 여자의 형상, 철저히 고독한 조울증. 그것이 결국 사랑 아니겠는가, 영화는 독백한다.

남지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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