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다은의 환등상장 <모비딕>’
우리가 영화에서 기대하는 음모론의 형상은 무엇일까? <모비딕>이 음모론을 화끈하게 다루지 않아서 아쉽다는 일련의 평들을 접할 때마다 그런 질문을 하게 된다. <모비딕>은 어떤 점에서 음모론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와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나? 개인적인 결론은 이렇다. 어쩌면 그것은 이 영화의 단점이 아니라, 핵심이며, <모비딕>에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지점인지 모른다. 대개의 경우, 관객이 영화 속의 음모론에 기대하는 바는 둘 중 하나인 것 같다. 음모의 배후를 파헤쳐 결국 베일이 벗겨지는 과정을 보여주거나, 음모의 실체가 끝내 밝혀지지 않고 그걸 추적하던 자가 결국 무력하게 무너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 전자의 경우에는 휴머니즘에 대한 믿음을 토대로 영웅이 등장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세계=음모’의 도식 속에서 주체의 행위는 무의미해지고, 악몽의 현실과 염세주의적인 시선만 남는다. 후자는 우리의 현실세계이며, 전자는 그런 현실에 대한 우리의 환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둘은 영화적으로 양극에 위치하며 장르 안에서 조화롭게 공존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모비딕>은 어떤 쪽인가? 영화 안에서 민간인 불법사찰, 납치, 살인 등을 사주하며 현실을 교묘하게 지배하는 배후세력, ‘정부 위의 정부’는 결국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이방우 기자(황정민)는 목숨을 걸고 분투하지만, 사실이 지나간 자리에 언제나 한발 늦게 도착한다. 혹은 아무리 유효한 정보들을 획득해도, ‘정부 위의 정부’는 그 정보들의 총제적인 조합으로 그려지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다. 즉 영화는 배후세력의 털끝만 겨우 만지고, 아니, 만졌기 때문에 처절하게 희생되는 개인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영화의 특이한 점은 그렇게 암울한 세계관을 굴러가게 하면서, 그 세계에 완전히 압사되지 않는 개인의 지고지순한 행위를 동시에 작동시킨다는 데 있다. 개인은 사건 해결의 주체가 결코 될 수 없다고 보지만, 개인의 선택·양심·책임 등은 직설화법으로 부각하며 그에 대한 믿음만큼은 강건하게 유지하는 것. 둘의 화해될 수 없는 간극은 이 영화의 자기분열인가. 여기에는 굴복도, 승리도 없다. 달리 말해 <모비딕>은 장르의 정공법 안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장르적인 최소의 해결(쾌감)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즉, 이 영화의 고민의 방점은 위의 분열을 어떻게 해소할까가 아니라, 어떻게 끝까지 끌어안고 갈 수 있을까에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분열을 어떤 절망감이나 냉소의 기운도 없이, 다소 단순하게 느껴질 정도로 의심 없이 밀고 간다는 사실이 신선하다. 최근 한국 영화들이 세상에 대한 비관을 장르적 쾌감으로 전환하던 경향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그런 맥락에서 이방우 기자가 바다로 가라앉으며 가장 평화로운 표정으로 고래의 표면을 쓰다듬는 판타지 장면은 무기력함이 아니라 위안을 준다. 이 장면은 <모비딕>이 지키고 싶어하는 자신의 얼굴이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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