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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그남자 그여자네 ‘크레인 집’

등록 2011-07-03 20:36

<도시에서 그녀가 피할 수 없는 것들>(2008)
<도시에서 그녀가 피할 수 없는 것들>(2008)
남다은의 환등상자
<‘도시, 철탑, 크레인’>
박지연 감독의 단편 애니메이션 <도시에서 그녀가 피할 수 없는 것들>(2008, 사진)에서 주인공인 여인은 가난한 슈퍼, 가난한 강아지, 가난한 주민들이 사는 가난한 동네의 가장 싼 집에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거대한 크레인이 그녀의 집을 뿌리째 뽑아 공중으로 들어올리며 철거를 시작한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철거회사의 파업이 일어나 그녀의 집은 크레인에 매달린 채 저 높은 공중에서 위태롭게 떠 있게 된다. 원피스를 입은 가녀린 그녀는 거센 바람을 헤치고 거대한 크레인을 타고 오르내리며 하늘의 집에서 살기로 한다. 하지만 새가 찾아와 지붕 위에 앉기만 해도 집은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남자친구가 찾아와도 여인은 그와 같은 쪽에 설 수 없다. 타인과 한쪽 귀퉁이에서 체온을 나눌 수 없는 집, 시소를 타듯 불균형한 위치에서 서로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집, 오직 여인이 자신의 육체를 무게중심으로 삼아서 바람의 흔들림을 버틸 수 있는 집. 이 공중에 매달린 집은 도시에서 가장 외롭고 피로한 빈민의 집이다.

변해원 감독의 단편 다큐멘터리 <철탑: 2008년 2월25일 박현상씨>(2008)의 박현상씨는 지엠(GM)대우 부평공장에서 일하다가 하청업체의 폐업을 이유로 해고된 노동자다. 그는 61일째 교통관제탑에서 고공농성을 하는 중인데, 철탑 내부, 누우면 다리조차 뻗기 힘든 공간에 카메라를 세워두고 자신의 일상을 담았다. 하염없이 눈이 오는 추운 밤, 비닐 장막을 때리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홀로 철탑에 남아 <씨네21>에 실린 홍상수 감독의 <밤과 낮> 기사를 보는 그는 투사보다는 한없이 지치고 쓸쓸해진 남자의 모습이다. 그가 카메라를 쳐다보며 긴 정적과 망설임 끝에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땅을 밟고 사람과 마주보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라고 내뱉을 때, 그 말의 울림은 어떤 선명한 구호보다 크다. 하지만 그가 비닐 장막을 살짝 걷고 내려다본 도시의 풍경은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적막하고 무심하다. 그날, 이명박 정부가 출범했다.

2년 전 무렵 본 이 두 편의 영화가 내내 맴돌던 날들이었다. 땅을 밟고 사는 것에 대한 고마움을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내가 땅에 내려올 수 없는 자들의 운명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지난 6개월 동안 그녀를 내려갈 수 없게 만든 녹이 슨 집, 그녀의 85호 크레인. 계절이 바뀌어도 꽃도 안 피고 새도 안 날아오는 집. 쇠로 된 그 집에서 그녀는 아주 작고 소박한 텃밭을 만들어 그 질기고 푸른 생명을 붙잡고, 170일이 넘도록 자신이 투명인간이 아님을 증명해내고 있다. 흔들리는 크레인 위에서 그녀 홀로 저 멀리 하늘을 보며 말한다. “노을을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오늘은 없어요. 그냥 갔어요, 해가. 그냥 인사도 없이.”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를 외치며 오늘도 고공농성 중인 그녀의 이름은 김진숙.(http://plogtv.net/41에서 그녀가 찍은 “김진숙 위원의 85호 크레인생활”을 볼 수 있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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