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언달러 베이비>
허지웅의 극장뎐
이지훈은 1969년에 태어났다. 그는 세상에 별 관심이 없었다. 아니 최소한 그렇게 보였다. 그는 영화를 파고들었다. 그와 함께 89년 연세대 사회학과를 다닌 어느 형은 “남들은 모두 최루탄에 콜록대며 여기저기 뛰어다니는데 혼자 따로 놀았다. 당시에는 재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대학 재학 중 시네마테크에서 만난 사람들과 영화 동아리 ‘광랑’을 조직했다. 이후 국회도서관에서 군 복무를 했다. 평생 볼 책을 거기서 다 읽었다고, 그는 자랑하듯 말하곤 했다. 그는 영화잡지 <스크린>의 인턴 기자로 일하다가 졸업 후 정식으로 입사했다. 97년 12월에는 ‘광랑’의 멤버들과 함께 월간 무가지 <네가>를 창간하면서 편집장이 되었다. 나이 28세. 최연소 편집장이었다. 그가 <네가>에 쓴 글들은, 천재적이라는 다소 낡은 수사를 기꺼이 참아줄 수 있을 만한 것이었다.
그리고 2000년 10월 당시 온라인 매체였던 <필름 2.0>의 지면매체 창간을 이끌었다. 초대 김광철 편집장과 이현수 편집장을 거쳐 2004년 11월부터는 편집장으로 일했다. 한국이라는 불균질한 시장 상황 아래서 영화 주간지를 꾸려 나가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취재원과 주요 광고주가 같다는 영화 주간지의 가장 큰 딜레마는 언제나 그를 괴롭혔다. 어찌됐든 <필름 2.0>은 한동안 잘 굴러갔다.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 좋은 글도 많았다. 좋은 잡지였다.
그는 참 괴상한 사람이었다. 한겨울에도 반팔,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출근했다. 선배 춥지 않아요? 춥지 않다. 또한 대단한 결벽증을 가지고 있었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화장실에서 손을 씻었다. 화장실에 자기 이외의 다른 사람이 있는 것도 잘 참아내지 못했다. 가끔 화장실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그는 행여 몸이 부딪힐까봐 장무기의 몸짓으로 유영하며 한쪽 벽을 타고 흘러가 문밖으로 탈출했다. 다시 말하지만, 참 괴상했다.
그는 입버릇처럼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를 이야기했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밀리언달러 베이비>(사진)였다. 평소 딸 이야기를 그리 지겹게 늘어놓는 사람이니, 아무래도 좋아할 만한 구석이 많은 영화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2007년 1월19일은 이스트우드의 신작 <아버지의 깃발> 시사회가 있던 날이었다. 그는 그날 극장에서 쓰러졌다. 뇌종양이었다. 소식을 전해 들은 우리는 충격에 휩싸였다. 당장이라도 등 뒤에서 나타나 깐죽거리며 나를 괴롭힐 것 같았다. 그러나 아침에 사무실을 찾을 때마다 편집장의 의자는 비어 있었다.
거짓말처럼 기적처럼 그는 일어났다. 그리고 멀쩡하게 다시 살았다. 다른 쪽 뇌에 병이 전이된 건 지난해였다. 힘들고 어려운 병이었다. 결벽증이 심한 그에게 참기 괴로운 순간들이었을 것이다. 이지훈은 2011년 6월30일 오전 4시40분, 굵직한 마흔두 해를 뒤로하고 세상을 떠났다. 형수님은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도, 남들이 자신에게 폐를 끼치는 것도 잘 참아내지 못했던 사람”이라는 말로 그를 추억했다.
이지훈은 이 땅에 영화기자라는 말이 생소했던 시절, 같은 색깔의 꿈을 공유한 사람들에게 유의미한 방향과 담론을 제시했던 시대의 사람이었다. 고 이지훈 편집장의 영면을 빈다. 선배가 보고 싶다. 정말 너무 보고 싶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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