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다은의 환등상자 <마당을 나온 암탉>
창 사이로 간신히 목만 빼꼼하게 내밀 수 있는 비좁은 양계장 안, 다닥다닥 붙은 암탉들에게 허락된 움직임은 단 두 가지다. 시간마다 기계에서 쏟아지는 대량의 모이를 쪼아 먹고 컨베이어 벨트 위에 알을 낳는 것. 무언가를 품고 어루만지는 생의 시간은 여기 없다. 이곳은 욕망도, 의지도 없이 오직 흡입과 배설의 쳇바퀴로만 굴러가는 세계다. 무감한 표정으로 동일한 동작을 반복하는 암탉들 무리에서 그때, 한 암탉이 안간힘을 쓰며 개체성을 주장하고 있다. 다른 닭들이 먹이를 쪼기 위해 철창 밖으로 목을 뺄 때, 이 암탉은 양계장 밖, 마당을 하염없이 쳐다보느라 고개를 내민다. 마당을 자유롭게 거니는 병아리, 닭, 오리 떼 각각에게 이름 붙이기를 즐기는 그가 스스로에게 지어준 이름은 ‘잎싹.’ 유독 상실감과 애틋함에 젖어 병아리 떼를 바라보는 잎싹은 곡기를 끊고서 알을 생산하는 기계가 되길 거부한다. 양계장 밖에서는 잎싹도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홀로 낯선 곳을 꿈꾸는 자에게 돌아오기 마련인 그 꿈의 대가는 양계장의 지옥보다 견디기 쉬운 것일까?
양계장을 탈출한 잎싹의 보살핌으로 새끼 청둥오리 초록이 우아한 철새로 거듭나는 성장담이 한 편에 있지만, 애니메이션 <마당을 나온 암탉>에서 마당 밖 세상은 실은 어른의 세계다. 그건 이 세계가 현실적 조건을 극복하며 자아를 고양하는 영웅적 행위가 아니라, 자아를 깎아 그 조건을 수용하는 부단한 피로의 과정으로 지탱된다는 의미다. 초록이 운명을 개척하려는 자의 전형적 형상이라면, 잎싹, 족제비, 나그네는 삶의 극점에 도달하려는 욕망을 버릴 수밖에 없는 자들의 모습에 가깝다. 이를테면 강한 날개를 펄럭이며 최고의 파수꾼이었던 나그네는 한쪽 날개를 다치고 사랑하는 여인마저 잃은 초라하고 외로운 사내가 되었다. 시름에 잠긴 나그네는 어린 아들을 잎싹에게 맡기고서 보름달이 뜬 밤, 원수 족제비에게 대결을 청한다. 그러나 달빛 속에서 마치 논개처럼 족제비를 붙잡고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나그네의 마지막 비상은 그 스스로 선택한 파수꾼의 파국적인 최후다. 종이 다른 아들을 지키기 위해 오리의 삶의 조건에 몸을 맞추는 잎싹은 늪지대의 습기에 내내 병에 시달린다. 잎싹은 모험 대신 모성을 택한다. 아들을 떠나보낸 잎싹이 “나는 왜 한 번도 날아볼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라고 읊조리는 순간, 그 씁쓸한 회한이 서글픔을 담아내기도 전에 그는 적의 굶주린 새끼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던진다. 그때, 어찌할 수 없는 어미의 마음으로, 누군가의 어미인 잎싹을 죽이러 달려가는 애꾸눈 족제비의 눈물은 비루하다. 그러나 그 비루한 눈물이 새끼들의 생을 구할 것이다.
죽음을 끌어안은 이들의 마지막 모습은 비애로 가득 찬 자멸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때 용맹하게 자유를 꿈꿨을 이들이 어찌할 도리가 없는 삶의 한계 앞에서 자기를 버릴 때의 울림이 있다. 때로는 그 무엇보다도 위대한 결단이 되는 체념. 영화평론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